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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지켜낸 조선어학회 이강래 선생은 충청인

충주 출신으로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옥고 치뤄
서울과 경상도 출신 가운데 유일한 충청인 발견
말과 글 지키려 했던 충청 민족투사 재조명 필요

이해미 기자

이해미 기자

  • 승인 2019-01-20 18:23
  • 수정 2019-01-20 22:16

신문게재 2019-01-21 5면

조선어학회
두번째 줄 맨 오른쪽이 이강래 선생.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일제강점기 한글로 민족 정신을 지켜온 조선어학회 이강래 선생이 충청인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학계의 목소리가 높다.

백낙천 배재대 한국어교육원장(한국어문학과 교수)은 본보와 함께 말모이 운동과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 시킨 조선어학회 인물 가운데 대전을 비롯한 충청인 찾기에 착수했다.

이 결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33인 가운데 이강래 선생이 충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강래 선생은 충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이후 귀국해서 조선어학회 활동을 했고, 1942년 서울에서 검거돼 투옥됐다. 해방 후에는 한글학회(조선어학회의 후신) 이사와 배화여고 교장을 역임했고, 1967년 생을 마감했다.

한글학회 100년사에 의하면 이강래 선생(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감)은 1932년 5월 ‘한글’ 창간호에 조선어학회 초엽 회원으로 실려있다.

백 원장은 “조선어학회가 서울에 있었고 출신지로 보면 경상도 출신이 절반에 달한다”며 “이 가운데 충청인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사실상 없었다. 이강래 선생의 고향이 충주라는 사실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강래 선생이 충청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어학회 인물 가운데 충청 출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방 후 이데올로기와 엮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월북과 학맥으로 갈라지면서 당시 조선어학회는 일반적인 독립투사에 비해 큰 주목 받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 영화 ‘말모이’가 개봉하면서 한글로 나라의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울림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백 원장은 “조선어학회 일원들은 한글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투사”라며 “현재까지도 이들의 업적을 선양하지 못했음은 우리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충청에는 조선어학회와 관련한 역사적 자료가 꽤 남아있다.

한글학회가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 시절이었던 1985년 조선말 큰사전 초판본 5권(등록문화재)을 기증했다. 약 35년 동안 우리 지역에 조선말 큰사전이 보관돼 있었던 셈이다. 현재는 상설전시관인 6관 민족운동 문화 수호운동 코너에 복제본 한 권이 전시돼 있다. 국가기록원은 2016년 조선말 큰사전 원고 복원을 실시하기도 했다.

대전문학관에는 조선말 표준어 모음 책 한 권이 기증돼 있다.

백낙천 원장은 “조선말 큰사전은 배재학당 출신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출발했다. 한글운동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 시키려고 했던 주시경 선생과 이강래 선생, 조선어학회를 기억하며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유산으로 지켜가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해미 기자 ham7239@

문화유산포털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는 조선말 큰사전. 사진=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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