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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분수를 모르는 사람의 말로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방원기 기자

방원기 기자

  • 승인 2019-05-29 09:34
손종학 01086489915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세상 살면서 '분수'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한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 분수를 알라, 분수껏 해라 등등. 표현은 다양하지만, 밑바닥에 흐르는 의미는 같다. 탐욕과 교만에 뭔가 주제넘고, 자신의 능력에 비추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모습으로, 세상 살면서 우리가 피해야만 하는 내용이다.

'분수'의 한자어는 흔히 사용하는 수학 용어처럼 '分數'로 표기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나, ‘사물을 잘 분별하고 헤아리는 슬기’ 등으로 이해된다. 결국,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를 넘어 더 가지려는 자, 혹은 사물을 잘 분별하고 헤아리는 슬기가 없이 욕심만 내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자기의 처지나 신분을 망각하거나, 이를 분별하는 슬기가 부족하고, 그래서 탐욕스럽게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고, 급기야는 패가망신의 말로로 들어서는 것일까? 궁금함에 나름의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분수'의 '분(分)'은 본디 나눈다거나 나누어 준다는 의미의 한자어다. 나눈다는 것은 각자가 가져갈 합당한 '몫'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몫'이 없다면 나눌 것도, 가져갈 것도 없기 때문이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힘을 모아 사냥하거나 농사를 지어 수확하면, 기여도에 따라 '몫'을 정하고 나누어 준다. 자기의 사냥이나 수확의 기여도에 비하여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자는 공동체가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서와 신뢰를 깨서 공동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더 많은 '몫'을 가지려는 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왜 그럴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본인이 받을 '몫'을 잘못 계산하기 때문은 아닐까? 즉 공동체나 상대방이 인정하는 몫과 본인이 생각하는 몫의 크기가 다름에서 오는 불행한 '착오' 내지는 '탐욕' 말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공동체나 상대방이 인정하는 몫보다 본인의 몫이 더 크다고 여기며 더 가져가려는 것일까? 그것은 본인 몫을 계산함에 있어 본인이 이룬 성과나 업적,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 타인과 공동체의 기여와 도움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본인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이룬 것이라는 착각이나 오만에 기인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감사가 없다는 점이다. 주변의 도움을 인정하지 않기에 감사함이 있을 수가 없다. 자기 몫을 망각한 채 분수 모르고 덤비는 자들에게는 조직은, 동료는, 직책은 또 하나의 욕심 만족을 위한 도구나 수단에 불과하다. 조직과 동료는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나 동료나 조직도 분수 모르는 자 이상으로 현명하고, 똑똑하기에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금세 알아차린다. 분수를 모르는 자만 모를 뿐이다.

이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신의나 신뢰의 가차 없는 파괴다. 신의나 신뢰는 자신들의 욕망 충족에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만 지킬 가치가 있을 뿐, 욕망 충족에 별다른 도움이 없다고 느낄 때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러기에 이들에게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찾아볼 수 없고, 이런 자들이 있는 조직의 명운이 어떨지는 불문가지다.

그러나 너무 걱정이나 염려는 말자. 세상은 공평하고 정의롭다. 구성원이 두 눈 부릅뜨고, 두 귀 쫑긋 세우고, 입을 열어 외치기만 한다면, 이런 자들은 발붙일 여지가 없다. 조직은, 동료는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료가 열심히 차린 밥상에 수저 하나 들고 독상을 받아먹으면 체하기 십상이다. 그것이 세상사 오랜 경험법칙이다. 이를 아는 자가 지혜로운,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성경은 경고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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