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의 ‘다도해’ 찬샘정

[대청호8경]-7경 찬샘정

글=임연희.동영상=이상문 기자

글=임연희.동영상=이상문 기자

  • 승인 2008-11-06 00:00

신문게재 2008-11-07 10면

태어나 뛰놀던 마을이 대청호 깊은 물속에 잠기며 고향을 등져야했던 대전지역 수몰민들이 둥근 보름달이 뜨는 달밤이나 부슬부슬 비가 내려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이면 하나둘 모여드는 곳이 있다.

달빛 머금은 대청호의 다도해라 불리는 찬샘정이다.

찬샘정은 옛날부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얼음처럼 차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찬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찬샘내기(냉천동·냉천골)에서 따온 것으로 대전 동구청은 지난 1999년 이곳에 정자를 만들어 실향민들에게 고향의 향수를 전하고 있다.

판암동으로 들어가 추동에서 오른쪽 미륵원과 관동묘려 방향으로 들어 가다보면 고즈넉한 산길이 하염없이 펼쳐지는데 세 갈래 길에서 왼쪽을 택해 오르막을 따라가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대청호 경관이 일품이다.

그러나 막상 찬샘정 정자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절경은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나다.

드넓은 호수에 비친 하늘 그림자와 아기자기한 산들, 물 가운데로 올록볼록 솟아오른 크고 작은 섬들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바다를 가지지 못한 내륙 사람들에게 바다와도 같은 호수의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하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찬샘정은 대전의 다도해다.

대전 시민에게 다도해의 달밤을 선물하는 찬샘정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수몰민들의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풀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찬샘정 옆에 서 있는 수몰민의 사연이 깃든 시비 ‘추억에 그 세월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람은 모두 호수 가운데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이리라.

“산도 좋고 물도 좋은 내 고향 냉천(冷泉)땅에서/괭이 들고 땅을 파던 그 시절이 그립구나/한잔 술에 취해버린 머나먼 타향에서/고향을 생각하며 향천(鄕川)을 외쳐 봐도/아, 대답 없는 이내 고향을//인심 좋고 마음씨 고운 황금옥답/기름진 땅에서 소를 몰며 밭을 갈던/그 시절이 새롭구나 세세연연 정든 고향/금수(錦水)에 묻혀버리고 세상을 원망하랴/한탄도 해보건만/아, 서글픈 이내 고향을….”<‘추억에 그 세월을’中>

갈대밭이 많다던 갈전(갈밭)이 고향인 변병균(56·대전시 동구 성남동)씨는 “보름날 즈음 호반 위에 떠오른 둥글고 흰 달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면서 “북한은 통일이라도 되면 갈 수 있지만 80m 깊은 물속에 잠긴 내 고향은 꿈에서 밖에 갈 수 없는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찬샘정 길을 정비해 지역 관광 명소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는 대전 동구청 박헌오 부구청장은 “찬샘정 길을 걸으며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열정이 식은 사람”이라며 “찬샘정에 갈 때는 따로 걷던 연인들이 내려오는 길에는 두 손을 꼭 잡고 온다는 속설도 전해진다”고 들려줬다.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애태우는 청춘남녀들은 둥근 보름달이 뜨는 밤 대전의 다도해 찬샘정 앞에서 사랑 고백을 해보면 좋을듯하다.


대전 최초 사회복지시설 미륵원

미륵원은 회덕(懷德)의 토족(土族)인 회덕 황씨 가문에서 여행자를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 사립여관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대전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회덕황씨의 2대조 황연기가 중건해 3대에 걸친 110년(1332~1440)간 덕행을 이어왔으며 이곳을 찾는 길손들이 여름에도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미륵원 남쪽 부근에 남루(南樓)를 짓기도 했다.

미륵원과 남루는 조선후기 이후 폐허가 되어 터만 내려오다 남루만 1980년에 정면 4칸의 단층 건물로 복원돼 아쉬움을 남긴다.


쌍청당 키워낸 류씨 부인 재실 관동묘려

관동묘려는 열부(烈婦) 정려(旌閭)를 하사받은 쌍청당(雙淸堂) 송유(1389~1446)의 어머니 류씨 부인이 문종 2년(1452) 82세로 별세하자 대전시 동구 마산동에서 장례를 치르고 그 옆에 건축한 재실이다.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류씨 부인은 당시 풍속으론 재가가 가능해 시집을 가라는 친정부모의 권유를 물리치고 개성에서 시댁이 있는 회덕까지 한밤중에 걸어왔다.

시댁에서 홀로된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자 류씨 부인은 등에 업은 네 살짜리 아들을 보이며 “남편은 잃었지만 어린 자식을 따르며 삼종지도 하겠다”고 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그 어린 아들이 은진 송씨 중시조인 쌍청당 송유이고 송유의 후손으로 송준길, 송시열과 같은 유학자들이 탄생한다.


조광조와 개혁 주도한 김정 선생

충암(沖庵) 김정(金淨)은 조선 중종 때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인물로 미신타파와 향론의 상호부조에 힘썼고 향약을 전국에 실시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충암은 기묘사화(1519)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돼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1521년 조정으로부터 자진하라는 왕명을 받고 절명사를 지은 후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별세하니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대전시 동구 신하동 충암 선생의 별묘를 지키고 있는 16대 종부 최진하(95)할머니는 “1978년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긴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서 현재 자리로 이주하면서 신도비(神道碑)와 위패를 보관한 별묘, 산해당, 정려각도 옮겨왔다”면서 “이곳에서 매년 10월 충암 선생의 제사를 지낸다”고 전했다.

별묘는 국가에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나라에서 가묘를 별도로 만들어 주고 영원히 제향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으로 대전에서는 동춘동 송준길 선생과 충암 김정 선생 별묘 단 두 곳뿐으로 그 의미가 크다. /글=임연희 기자/사진 동영상=이상문 기자

※ 본 시리즈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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