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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다시 도시락족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20-04-22 10:58

신문게재 2020-04-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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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1월의 여행을 떠올리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1주일 휴가를 내고 1천m 넘는 영남 알프스의 고봉들을 차례로 오르던 때였다. 산이 워낙 높아 새벽부터 올라 정상에 다다르면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허기졌다. 김밥과 주전부리로는 아쉬웠다. 하지만 천왕산에선 최고의 만찬을 누렸다. 억새가 드넓게 펼쳐진 능선을 감상하며 쉬고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몰려왔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중년의 남녀 한 패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잔칫상'을 펼쳤다. 음식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푸짐했다. 수육, 겉절이, 상추, 여러 가지 과일, 막걸리, 절편…. 먹기 위해 산에 온 모양이었다. 푸짐한 쌈이 그들의 입으로 쉴새없이 들어갔다. 나는 옆에서 군침만 흘렸다. "어디서 왔어예? 같이 드입시더." 배추겉절이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수육을 올려 볼이 미어터지게 먹었다. 후한 인심과 함께 싱그런 가을바람을 맞으며 먹은 진수성찬 도시락은 처음이었다.

퇴근 후의 저녁이 분주해졌다. 다음날 싸갈 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다시 도시락족이 됐다. 교열부에 혼자 있을 땐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다. 그러다 재작년 9월 미디어부로 발령나면서 외식을 하게 됐다. 1년 7개월 먹었나. 매일 먹는 식당밥이 신물이 났다. 점심 때가 되어 배는 고픈데 딱히 뭘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아무 거나 먹지 뭐.' 단지 배가 고파 위장에 음식을 기계적으로 욱여넣는 뻔한 밥이 지겨워졌다. 왜 식당밥은 성형미인처럼 금방 질릴까.



봄나물이 지천이다. 금요장터에 가서 쌉싸래한 머위와 두릅, 야들야들한 혼잎, 칡순, 오갈피순을 손에 가득 사들고 들어온다. 이것들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고추장, 된장과 참기름으로 무쳐 내면 보약이 따로 없다. 예전 학교 다닐 적 이맘 때 엄마가 만든 동치미무 무침도 별미였다. 엄마는 겨우내 먹고 남은 시큼한 동치미 무를 채 썰어 고춧가루, 파, 마늘,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도시락 반찬으로 싸줬다. 새 학기 낯선 교실에서 아직은 서먹한 친구들과의 점심시간이 아련하다. 그때 썰렁한 도시락밥과 먹는 동치미무 무침이 얼마나 맛있던 지. 이젠 아픈 엄마 대신 언니가 만들어 날라다 주느라 바쁘다. 지난 주엔 오이소박이, 열무김치, 동치미무 무침 등 한 보따리 가져와 냉장고 안이 풍년이다.

도시락을 먹는 시간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1식 3찬. 간소한 밥이지만 마음은 풍성하고 온기가 스며든다. 명상하듯 천천히 한 술 한 술 음미하면서 먹는다. 밥알 하나도 허투루 버릴 수 없다. 내 손으로 지은 밥인 것이다. 머위 무침과 상큼한 열무김치를 먹으며 봄의 기운을 온 몸으로 느낀다. 먹는 틈틈이 신문도 훑어보고 책 한 줄 읽는 맛도 즐거움이다. 마침 정치적 병역거부자의 수감생활 수기 『감옥의 몽상』을 읽었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그의 성찰과 사색도 되새김질한다. '여름 징역살이'는 다른 수인들과 물리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감방에 대한 얘기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감방의 옆 사람을 단지 열덩어리로 느끼게 하는 여름의 징역살이는 형벌 중의 형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영복은 부정적 경험을 방어하기 위해 몸을 초월한 자아를 구축하는 데에 몰두했다.

점심을 먹은 후 종종 회사 옆 아파트 단지를 산책한다. 오래된 아파트인데 나무가 무성해 숲속에 아파트가 들어선 느낌이다. 덕분에 새들에게도 천국이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하다. 인간에게 바이러스의 창궐은 무얼 의미하나. 모든 관계는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평화롭다. 이번 주말엔 계란말이, 총각김치로 도시락 싸서 보문산 둘레길 걸어볼까. 자연과 눈맞춤하면서 천천히.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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