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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할머니, 그만 우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김형률 대전가정법원 부장판사

윤희진 기자

윤희진 기자

  • 승인 2020-05-11 08:27
  • 수정 2020-05-11 08:35
김형률 부장판사
김형률 부장판사

소년보호재판을 진행하다 보면 눈물을 많이 봅니다. 나이 어린 소년들로서는 딱딱한 법정의 분위기가 두렵기도 하겠지요. 보호소년이 흘리는 후회의 눈물도 안타깝지만, 그런 자식을 바라보며 보호자가 흘리는 눈물은 더욱 애가 탑니다. 특히 그 보호자가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일 경우 울음은 대개 통곡이 되고, 신속한 재판진행은 난망해 집니다.

자녀의 이혼으로, 재혼으로, 파산으로, 해외 거주로... 다양한 이유로 손자를 떠안게 된 할머니는 눈물로 호소합니다. 자신의 손자가 얼마나 불쌍한 아이인지, 자신이 얼마나 어렵게 손자를 거두었는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슬며시 그 자녀, 즉 보호소년의 부모가 미워집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자신을 기르느라 노쇠한 부모에게 손자까지 기르게 하다니요.

하지만 당사자인 할머니가 자식을 원망하는 말은 듣기 어렵습니다. 모든 건 그저 자신이 박복한 탓이지요. 이쯤에서 저는 말합니다. "할머니, 그만 우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하지만 정작 속 시원하게 해드릴 말은 없어 눈만 껌벅이게 됩니다.



할머니는 말합니다. 손자가 통장을 만들려고 할 때, 휴대전화를 가지고 싶어 할 때, 학교에서 부모 동의서 가져오라고 할 때, 이를 들어줄 수가 없다고. 다른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할 때 손자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느냐고. 위와 같은 일에는 손자를 대신해 이러한 일들을 처리해 줄 수 있는 친권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부모가 해주어야 하는 것들이죠. 판사인 저는 민법이 미성년자의 친권자로 '부모'만을 규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손자의 친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손자를 아무리 오랫동안 길러왔더라도 말이죠.

할머니는 말합니다. 손자를 학원에 보내고 싶은데, 자식 혹은 사위, 며느리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다른 아이들은 다니기 싫어 아우성인 곳을 오히려 다니지 못할 때 손자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느냐고. 판사인 저는 민법이 양육비 청구의 주체로 이혼한 부 또는 모만을 규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양육비 청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손자의 양육에 아무리 많은 돈을 쓰더라도 말이죠.

할머니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손자를 기르고 있는 자신이 친권행사도 못 하고, 양육비 청구도 못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더 있습니다. 손자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경우 그 보험금, 합의금은 자신에게 양육비 한 푼 줘본 적이 없는 자식이 가져간다는 것을. 나아가 자신에게 손자를 맡긴 아들이나 딸이 사망한 경우 그 재산은 손자를 놓아둔 채 가출해버린 며느리나 사위에게 상속된다는 것을.

사실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친권이 필요한 할머니께는 자식의 친권을 상실시키고 할머니가 후견인이 되시라고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싫어하셔서 문제죠. 손자도 귀하지만 자식도 귀한 할머니들에게 친권상실은 천륜을 끊어버리는 몹쓸 짓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입니다.

 

양육비가 필요한 할머니께는 부양료 또는 부당이득금 청구를 하시라고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하시기에 너무 어려워서 문제죠. 나름 친절히 알려드린다고 ‘요보호성’이니 ‘법률상 원인 없음’이니 말씀드려도 기억 못 하기 십상입니다. 보험금, 합의금 문제는 고 구하라 씨 사례와 그로 인한 입법청원이 딱 들어맞는 내용이지만, 현실의 울음을 앞에 두고 법 바뀔 때까지 기다리시라 하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면, 우리 민법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가족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다른 형태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말이죠. 이제 기존 가족의 개념에 포용하기 어려운 조손가족과 같은 새로운 가족형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예전 호주(戶主) 중심의 대가족에서 소위 '핵가족'으로 변화한 가족의 모습을 우리 민법이 충실히 반영하였듯 말이죠. 2008년 한부모가족지원법이 조손가족을 지원대상자로 인정하고, 2016년 민법이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을 인정함으로써 관련 논의가 시작된 감은 있습니다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

우리 사회에 조손가족이 급증한 것은 IMF 사태로 인한 가족해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염동훈 등, 조손가족 실태조사 및 지원방안 연구, 여성가족부, 2007년). 코로나19 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현재의 우리 사회가 그때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저만의 기우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김형률 대전가정법원 부장판사

 

▲김형률(50·사법연수원 32기) 부장판사는 2018년 2월 대전가정법원에 부임한 후 2년째 소년보호재판과 비송재판(친권상실, 친권자 지정, 재산분할 등)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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