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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상념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윤희진 기자

윤희진 기자

  • 승인 2021-02-01 08:23
양성광이사장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모처럼 반짝 따스해진 틈을 타 가끔 캠핑하던 금강 변 모래톱을 찾았다. 강물은 무심한데, 흐르는 물결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을 머금은 듯 일렁인다. 이제 2021년의 첫 달이 막 지났는데, 바이러스 탓만 하며 무기력하게 보낸 지난 한 달여의 시간이 벌써 후회된다. 이러다가는 뭐가 뭔지 모르고 허둥대다 흘려보낸 2020년처럼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내 젊은 날들이 이렇게 흩어진다 생각하니 허망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콘크리트 도시를 벗어나 흙 내음 가득한 자연과 마주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마스크를 벗고 아이 같은 긴 호흡으로 흉강을 한껏 부풀려본다. 오랜만에 아~ 참 좋다!

눈 부신 햇살이 강물 표면에 부딪혀 무수한 반짝이를 수면 가득히 흩뿌린다. 홀린 듯 물멍을 한참 동안 때려본다. 모래톱에 처박힌 예쁜 몽돌 하나가 눈에 밟힌다. 쪼그리고 앉아서 여기까지 오게 된 수백만 년의 사연을 느껴본다. 소싯적 추억이 떠올라 납작 돌로 물수제비를 떠본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소소한 일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런 게 ‘소확행’일까? 철학자 최진석은 "소확행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학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서 큰일을 할 때 에너지가 되는 소소한 즐거움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크게 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것은 불행하다는 것이다.

옳은 말인데,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이 답답함을. 큰일에 뛰어들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너무나 빨라 겁이 난다. 따라가기도 벅찬데, 최소 한두 발짝은 앞서야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단다. 그래도 그런 사람이 넘쳐나니 기가 죽는다. 모두 바쁘게 돌아가니 다들 주위를 살필 여유조차 없다. 앞서가는 사람도 뒤따르는 이도 헐떡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AI가 인간의 영역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변화의 속도에 지친 사람들을 더욱 옥죄고 있다. 전문가들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예측을 쏟아내고 있으나, 보통 사람들이 이를 소화해 대응력을 갖추는 건 엄두도 내기 어렵다. 대신에 하던 대로 느리더라도 천천히 적응하려고 애쓰는 게 낫다. 우보천리라는 말처럼 사람은 느리지만, 천천히 걸어서 천 리 길을 가는 데 더 익숙하다. 어차피 변할 세상이라면 모두가 앞서 달릴 필요 없이 각자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와 3평 남짓 되는 내 방에 똬리를 트니, 창밖에는 벌써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창문 너머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연못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못 가를 수놓은 형형색색 조명등이 유리창에 반사돼 반짝거린다. 이 연못 주변은 아파트 건설 당시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유적지라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은 생활유적지에서 나온 유일한 동경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그 옛날 누군가가 저 달빛 아래에서 이 거울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꽃단장을 했겠지. 그이의 사연은 점점이 흩어져 연못 속에 잠겨버리고 동경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네 사연도 세월이 지나면 저렇게 흩어질 것을.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현재는 미래와 어떻게든 연결된다.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이 가슴을 따라 살아갈 자신감을 준다"고 했다. 지금 사소하게 보였던 일들이 미래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10년, 20년 후 미래에서 바라본 나의 오늘은 어떤 의미가 담긴 나의 과거가 되어 있을까? 오늘을 살아내려는 지금의 작은 행동들이 점점이 연결돼 나의 미래가 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응답하라 2021! 훗날 2021년의 추억이 많이 응답하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세월이 더 지나 혹시 나의 행동 또는 내 소유물 중 일부가 어떤 이에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타임캡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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