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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인칼럼]재판은 깊은 밤에 이루어진다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전문무역상담센터 전문위원·김이지 법률사무소 이지 대표변호사

박병주 기자

박병주 기자

  • 승인 2021-11-07 10:36

신문게재 2021-11-08 18면

변호사김이지사진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전문무역상담센터 전문위원·김이지 법률사무소 이지 대표변호사
필자는 지금 변호사로 일하고 있지만 처음 대학을 갈 때에는 공학도였다. 젊은 시절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기웃거린 끝에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법시험을 합격하기 전까지는 주변에서 법조인을 본 적도 없는데도 진로를 그렇게 정하게 된 것은, 약간은 민망스럽게도 법정 드라마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가끔씩 본 드라마들에서 막연히 갖게 된 인상이 차곡차곡 내면에 쌓여서 어느 날 문득 내 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옛날엔 의학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그해에는 의대가 커트라인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직업의 세계를 간접체험 시켜주는 게 TV 드라마의 한 기능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법정 드라마에서 감명 깊게 보는 장면은 아마도 대개 법정에서 펼쳐지는 검사와 변호인 사이의 대립 구도 그리고 재판부 혹은 시청자들을 향한 열정적 변론일 것이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의 명장면도 바로 배우 송강호가 법정에서 헌법 제1조 제2항을 인용하며 펼치는 변론 장면이 꼽히는 것처럼.

그런 드라마 속 재판 장면은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는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는 장면이겠지만, 솔직히 재판하러 법정에 출석하는 것이 업인 변호사들의 눈에는 정말 오글거린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그건 그냥 드라마일 뿐, 현실의 재판에서는 재판부와 방청객들을 향해 그런 멋진 변론으로 호소하는 장면 같은 건 거의 없다. 미국 법정 드라마의 경우에도, 미국의 재판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작가들이 상당히 양념을 많이 쳤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의뢰인들은 TV나 영화에서 본 법정 장면을 생각했다가 놀람과 실망을 표시할 때가 종종 있다. 아니, 소송이란 것을 처음 하는 분들은 다 그렇다. 처음으로 법정에 같이 가서 재판에 출석하고 나오면, 열에 아홉은 똑같은 말씀들을 하신다. '아니, 이렇게 금방 끝나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을 했는데, 말 한마디 제대로 안 하고 그냥 끝났네요.' 일반인들은 재판에서, 특히 변호사가 선임되어 있는 재판일수록 더 그러한데, 대체 무엇이 행해진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날의 재판은 끝난다.

그 이유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재판은 구두변론주의, 즉 재판정에서 말로 하는 것이 원칙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말로 할 내용을 서면으로 다 써서 내고 재판 때에는 그 내용을 말로 한 것으로 '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 장면을 생각하고 있던 의뢰인들은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는 것 같아서, 나는 의뢰인이 직접 출석을 원하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별 것 없는데 원래 그런 것이니 놀라지 마시라고.

이렇게 우리 실제 재판과 법정 드라마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서면을 쓰느라 앉아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우리 쪽의 주장을 하고, 증거를 조목조목 들이대고,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고, 감정에 호소하고, 상식에 호소하고, 법조문을 기둥 삼아 변호사들이 쓰고 있는 서면이 여느 법정 드라마 명장면의 변론 못지않다는 사실을. 법정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그동안 말해왔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법정 드라마는 실제로, 변호사인 내가 매일 밤 쓰고 있는 서면을 시각화해놓은 것이었다. 재판 때 말 한마디 않고 물러 나오는 변호사도 사실 송강호 못지않은 열정적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짜 재판은 낮이 아니라 밤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나는 낮에는 재판과 상담과 타지 출장으로 열심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계속 의뢰인의 사건을 고민한다. 그리고 밤에 시간을 내어 드라마의 대본을 만든다. 재판부에, 시청자들에게, 법이 무엇인지 정의와 공평이 무엇인지 상식이 무엇인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느냐 호소하기 위한 대본을. 나를 믿고 와준 내가 제작하는 드라마의 주인공, 내 의뢰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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