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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9월 4일'을 기억하는 파리 지하철역

이상훈 대전대 경찰학과 교수

방원기 기자

방원기 기자

  • 승인 2022-02-15 14:20
  • 수정 2022-02-15 16:52

신문게재 2022-02-16 19면

사진_이상훈_넥타이
이상훈 대전대 경찰학과 교수
가히 제왕적(帝王的)이라 할 만 했다. 광화문 광장을 걷다가 문득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을 바라보니 청와대는 감청 지붕의 여러 다른 건물과는 달리 대리석에 파란 기와를 올리고 있을 뿐 궁궐의 여느 전각(殿閣)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으로 들어서면 곧장 청와대로 발길이 닿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식민지배의 절대적 권위와 정당성을 빛바랜 왕조에 기대고자 했던 일제 총독과 미군정 사령관의 관저가 있던 자리여서였을까, 광장의 함성과 열기가 온전히 전해지기에는 너무 멀어 보인다.

광화문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빼앗은 후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 근정전 코 앞 지으면서 해체하여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하였는데,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아픔이 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2010년 8월 15일인데, 이때 '광화문' 현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을 1865년 고종 중건 때의 한문 현판으로 되돌렸다. 문화재 복원이자 제왕적 대통령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본다.

문민정부가 거듭되면서 제왕적 대통령의 잔재를 털어내려는 시도는 여러 번 이어졌지만 헌법개정 등 법적·제도적 문제에만 천착하였고, 그 결과 정치적 유불리에 얽매여 실패를 거듭해 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고 보다 근원적인 변화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싶다. 광화문 광장 일대는 과거 600여 년 조선왕조의 공간이었지만 봉건군주제를 버리고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의 가치를 내건 3·1운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과 6월 항쟁, 그리고 촛불혁명 역시 광화문 광장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서양사에서 유럽 절대왕정의 상징은 프랑스다. 루이 14세의 극성기 이후, 나폴레옹은 혁명의 미완으로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스스로 황제가 됨으로써 피 흘린 프랑스 시민들과 혁명정신을 욕되게 하였다. 군주제와 왕정 부활에 멍든 프랑스 시민은 100여 년에 걸친 투쟁 후 나폴레옹 3세를 몰아내고 제3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870년 9월 4일의 일이다.

20세기 들어 파리는 지하철역에 '카트르 셉탕부르(Quatre-Septembre, 9월 4일)'라는 이름을 지어 이를 기념하였다. 이로써 파리시민들도 프랑스 마지막 세습 군주 나폴레옹 3세를 퇴위시키고 얻어낸 민주공화의 정신과 자부심을 날마다 호흡하게 되었다. 파리의 또 다른 지하철역에서는 '공화국(Republique)'이라는 이름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파리시민들은 민주주의와 공화의 정신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서구 선진국도 놀라워한다. 홍콩과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은 민주화 운동의 모델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찾는 외국인에게 조선왕조의 유산만큼이나 광화문 광장도 명소다. 수도권은 세계적인 수준의 전철망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200개가 훨씬 넘는 지하철역 명칭 대부분이 행정동이나 관공서 중심의 교통정보 전달에 머무르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지키던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도 자리하게 되었지만 굳이 왕조의 위인들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실질적인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어젖힌 자유시민을 기억하는 공간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광화문 일대의 일부 지하철 명칭을 '광화문 광장' 혹은 '민주공화국'으로 바꾸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광주에는 '5월 18일'역을 두고, 대구와 대전에는 '2월 28일'역과 '3월 8일'역을 두면 어떨까. 그래서 광장의 함성과 민주공화국을 향한 시민의 의지로 말미암아 언제나 살아 숨 쉬고 전율할 수 있는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민주화 성지(聖地)임을 공기처럼 매순간 호흡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침마다 어제를 반추하고 오늘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모닝커피처럼 늘 곁에 두면 좋겠다.

이상훈 대전대 경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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