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막 |
필자도 유년시절을 공주 우성면 귀산이라는 시골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삼촌을 따라 마을 개천에 쳐 놓은 게막에 가끔 들른 적이 있다. 게막의 안쪽에 도랑 너비 40㎝, 깊이 30㎝를 파놓아서 싸릿대로 만든 게살에 걸렸던 게들은 물살을 따라 이 도랑으로 흘러든다.
게는 소리를 듣지는 못하나 빛에 민감하므로 도랑의 바닥만 비추는 장치를 해놓아야 한다. 게막은 보통 서너 사람이 함께 세우며, 잡은 게를 매일 사람 수대로 나누거나 하루하루 당번제로 잡기도 한다.
1814년(순조 14)에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 선생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실려 있는 게가 벌덕게[舞蟹], 살게, 농게, 돌장게, 삼게, 노랑게, 흰게, 화랑게, 몸살게, 참게, 뱀게, 콩게, 꽃게, 밤게, 동게, 가제, 흰돌게 17 종류가 나오는데, 여기서 민물게 즉 참게가 천해(川蟹)로 나온다.
지금은 '게'하면 꽃게나 대게를 제일로 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게 하면 민물게인 참게를 뜻했다. 이름부터 '참'게고, 풍속화나 시에 꽃게보다 참게가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풍속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다. 이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에는 뜻밖의 우의(寓意)가 숨어 있다. 로(蘆)는 갈대를 뜻하는데, '蘆'는 옛 중국 발음으로는 '려'와 매우 비슷하다. '려'는 원래 임금이 과거 급제자에게 나누어주는 고기음식을 뜻한다.
그 뜻이 확대되어 중국에서 과거 때 전시(殿試) 후에 진사(進士)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던 전려 혹은 여전이라고 하면 궁중에서 과거 합격자를 호명해서 들어오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게 두 마리가 갈대꽃을 물은 것은 소과(小科) 대과(大科) 두 차례 시험에 모두 합격하라는 뜻이요, 꼭 잡고 있는 것은 확실하게 붙으라는 의미다.
단원 김홍도의 해탐노화도 |
권력 앞에서 쭈뼛거리지 말고, 천성을 어그러뜨리지 말고, 되지 않게 앞뒤로 버정거리며 이상하게 걸을 것이 아니라, 제 모습 생긴 대로, 옆으로 모름지기 삐딱하게 걸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재상을 지낸 황희(黃喜, 1363년~1452년)는 "대쵸 볼 불근 골에 밤은 어이 뜻드르며,벼 뷘 그르헤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닉쟈 체쟝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라는 시조(詩調)를 썼는데,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대추가 붉게 익은 골짜기에 밤은 왜 떨어지며벼 벤 그루터기에 게는 왜 내려가는가. 술 익자 체장사가 왔으니 먹을 수밖에 없구나"
여기서 게는 민물게인 참게를 말하는 것이며, 가을이 되어 추수할 무렵이면 논에 살던 참게들이 바다로 가는 습성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참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동남참게와 금강참게로 구분할 수 있다. 금강 이북부터 한강, 임진강, 예성강에 사는 참게가 금강참게라 하고 주로 궁중에 진상하던 참게다.
동남참게는 섬진강과 동해안 하천에 주로 서식하는 참게다.
동남참게는 생김새가 금강참게와 다르며, 산란 시기도 달라 같은 참게라 해도 다른 종으로 보면 된다. 금강참게는 7월까지는 씨알이 작아 잘 잡지 않는데, 8월이나 9월초에는 껍질이 덜 딱딱해서 참게탕이나 민물매운탕을 해 먹으며, 9월 중순 이후부터는 살이 꽉 차기 시작하고, 알이 차고, 껍질이 단단해 져서 간장게장을 담아 다음해 봄부터 여름까지 귀하게 먹던 반찬이었다.
특히 금강참게 중에 유명한 것이 바로 노성(魯城)참게다. '노성(魯城) 윤씨 식도락(食道樂)하고, 연산(連山) 김씨 묘(墓) 치장하고, 회덕(懷德) 송씨 집치장 한다'는 말이 있고 논산에서는 '연산(連山) 닭 노성(魯城) 참게다'라는 말이 있다.
계룡산에서 흘러내려 온 맑은 계곡물인 금강의 지천이 노성천(魯城川)으로 이어졌는데, 이곳에서 잡히는 참게는 다른 지역의 참게보다 다리에 털이 적고 등판이 넓으며 맛이 좋았다. 이를 '노성참게'라고 불렀다.
노성참게는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진상하던 특산물로, 노성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이산현감(노성현감)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한다. 400여 년 전 조선 성종 때 지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공주목 이산현(尼山縣 : 현재 노성면) 토산(土産) 항목에 노성 참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게가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을에 잡은 참게는 산란을 위하여 하류로 이동하기 때문에 살이 많이 올라 맛이 좋다고 한다.
특히 노성참게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선생 종가의 내림 손맛으로 '간장게장'의 비법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필자는 노성면 교촌리 명재(明齋) 고택을 찾았다. 고택 한켠 넓은 마당에 장독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독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이 명재(明齋)고택은 선생이 살아계셨던 1709년에 아들과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이지만 정작 선생은 고택에서 4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고택 옆에 초가집이 두 채가 있다. 한 채는 종가가 사용하고 있고, 한 채는 독서실이라고 한다. 종부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노성천에서 나는 참게에 생소고기 다진 것을 먹인 후, 미리 끓여 식힌 교동전독간장에 파, 마늘, 밤 등의 재료를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 게가 잠기도록 부어 만드는 노성게장 즉 간장게장은 논산 파평 윤씨 종가의 내림 음식이다.
명재고택 |
살아 있는 게에게 고기를 먹인 후 게장을 담그는 법은 19세기 초 빙허각(憑虛閣)이씨(李氏)가 저술한 조선시대 생활백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와 역시 빙허각(憑虛閣)이씨(李氏)가 쓴 조리서로 사후(死後)인 1915년에 펴낸 『부인필지(婦人必知)』에 보면 살아 있는 게에게 고기를 먹인 후 게장을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노성의 파평 윤씨 종가의 노성게장은 쇠고기를 먹이지만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닭즙을 먹인다는 것이 다르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산 게를 그릇에 담고 닭을 튀하여 생으로 넣어 며칠 두면(삼일 정도) 게가 그 닭즙을 먹고 장이 유난히 많고 맛이 아름다우니 닭이 없으면 두부를 게에 넣어도 먹고 장이 많아지거든 내어 게발 아랫마디를 끊어 실에 매어 높이 달고 그릇을 바쳐 두면 맑은 물이 발끝마다 흘러내릴 것이다. 이것을 익히면 다 장이 된다. 게가 달이 없으면 살이 찌고 달이 밝으면 파리하니라. 잡식성인 게에게 닭고기나 두부 등의 동물성 먹이를 먹인 후 게장을 만들면 그 맛이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
참게탕 |
게젓에 꿀이 상극이라 하지만 조금 넣어야 맛이 좋아진다. 불빛에 닿으면 쉽게 변질되니 밤에 꺼내고, 그럴 때에도 불을 비추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게에게 닭고기나 쇠고기를 먹여 살을 찌운 후 장을 담그는 방식은 논산 파평 윤씨 종가에서 소고기를 먹인 후 만든 노성게장의 조리법과 유사하다.
참게탕 |
지금은 노성천까지 게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1990년 금강 하굿둑이 세워져 이로 인해 게가 노성천까지 올라오지 못하는 연유로 개체수가 급격히 줄기도 했지만 농약을 많이 사용해 생존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노성에 가면 '노성홍가네(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로 563 전화 041-736-5897)'가 유일하게 참게탕을 한다. 혼자 갔지만 취재를 위해 어쩔 수없이 참게탕(45,000원)을 시켰다. 3명이 먹어도 충분한 양이다. 참게탕에 민물게 3마리 민물새우와 수제비가 듬뿍 들어가 국물이 담백하고 구수하며 진하다. 화학조미료가 한 방울도 안 들어가도 민물게와 민물새우 육수의 맛은 가히 위력적이다. 혼자 먹고 남은 참게탕을 포장해 와 집에서 서너 끼는 해결한 것 같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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