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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이슈현장] '충청의 5.18', 민주화 향한 땀방울 진상규명은 진행형

80년 5월1일 충대학생들 전국 첫 거리로
목원대·공주사대·충북대 등 민주화 촉구
5월 광주 알린 유인물 중·고등생 연행도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4-05-16 17:36
  • 수정 2024-05-16 18:19

신문게재 2024-05-1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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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광주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안종필 열사의 모친이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을 맞는 마흔 네 번째 봄이 돌아왔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1980년 5월 민주화 요구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뜨거운 열기로 분출되었는데, 대전에서는 그동안 교내에서 머물던 '계엄령 해제'와 '민주주의 수호' 시위가 학교 밖으로 물결쳐 대전역까지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광주 밖 5·18, 그중에서 대전과 충남 학생들을 주축으로 이뤄진 민주화 물결을 다시 소환한다. <편집자 주>

1980년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전개된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1979년 11월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당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말을 맞았고,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로 다가왔다.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반발해 전국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시국선언과 집회가 잇달았다. 신군부는 불법 연행과 구금, 조사과정에서의 폭행, 고문으로 목소리를 짓눌렀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대하고, 학생들의 시위는 금남로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이후부터 같은 달 27일까지 이어진 시위와 계엄군에 대한 대응이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기 대전과 충남·북에서도 대학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향한 열기와 운동이 뜨거웠고, 계엄군의 불법연행과 구금, 고문이 자행됐다.

▲1980년 5월 1일 대전역



1980년 5·18은 이미 전해 11월부터 예비하고 있었다. 유신헌법에 따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접선거를 저지하고자 1979년 11월 24일 서울YWCA 회관에서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한 대통령 직선제 요구 집회가 펼쳐졌고 이는 계엄당국에 반기를 든 첫 군중 집회로 평가받는다. 이때 위장 결혼식에 참여로 충북대학교 학생 2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구성원 2명이 마찬가지 이유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과 탄압의 서막이 올랐다. 이로부터 닷새 뒤 충남대와 목원대에서 각각 서울에서 일어난 YWCA위장결혼식 사건 당시 시국선언을 기반으로 시국선언문을 낭독해 충남대와 목원대 학생 8명이 계엄당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어 공주사범대에서는 4월 28일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계엄령 즉각 철폐", "구속된 민주인사 석방", "대학 내 외부세력 배제" 등의 요구를 하며 다음날 오후 11시까지 이틀간 시국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5월 1일 충남대에서 학생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토론회를 갖고 학교 밖으로 진출을 시도해 경찰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는 투석전 끝에 대전역까지 행진했다. 여러 대학에서 이뤄지던 집회가 교내에 머물던 시기로 담장 밖으로 물결쳐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한 전국 첫 사건이었다. 같은 날 공주사대에서도 400여 명이 농성을 시작해 학장의 설득으로 해산은 이뤘으나, 일주일간의 휴교에 들어갔고, 충북대에서도 1000여 명이 시국성토대회 후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공주사대에서는 250여 명이 교외진출 공주읍내 반죽동까지 가두시위를 벌여 계엄해제를 촉구하고 학교로 돌아와 철야농성을 벌였다. 5월 15일 대전역과 충남도청의 중앙로 일원은 충남대와 목원대, 한남대(당시 숭전대 대전캠퍼스) 등의 학생들이 집결하며 "계엄령 해제"와 "연행 학생의 전원석방", "유신잔당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메아리쳤다. 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가 출간한 '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는 이날 시위와 집회가 5월 16일까지 계속되는 등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던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공주사대와 천안단국대, 충북대, 청주사대에서 이날 일제히 교내 시국성토 후 시내로 진출했다. 같은 해 6월 1일 연무중학교에서는 여학생 3명이 '전두환 광주살인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배포 후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달 중순 대전고에서도 광주학살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 교내에 배포하는 사건이 있었음이 규명됐다. 현재까지 파악된 충청지역 5.18민주화운동으로 예비검속에 의해 경찰과 군에 의해 구속되거나 연행되 순화교육 등을 받은 인원은 132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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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대전 민주화운동을 조명한 1996년 1월 '중도포커스' 기사 전문.
▲불법 연행과 구금·고문까지

이때 신군부는 전국의 31개 주요 대학과 136개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000여 명을 배치시켜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회 주요 간부 등을 검거했다. 대전과 충남에서 민주화 운동을 계획하거나 참여한 이들은 군과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 연행·구금되어 조사과정에서의 폭행과 고문 등을 당했다. 불법적인 조사 이후 재판회부 및 훈방으로 분류되었다. 충남대, 목원대, 공주사대, 천안 단국대학생 117명은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법 체포, 구금, 조사를 받았고, 28명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77명은 육군 제32사단 영내에서 일명 삼청교육 방식의 순화 교육을 받고 훈방되었음이 최근 확인됐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고 당시 문교부의 지시에 근거해 각 대학교에서는 문제 있는 징계를 내리고, 이후 재입학 관련 절차 및 관리 과정에서 학생들의 교육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 각 대학교는 출석 통지 및 소명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채 징계하고, 이후 사면령에 의한 복학 심사가 이뤄졌지만 선별적 재입학을 허용했다. 복학(재입학) 허용 불가를 받은 경우, 학업 시기를 놓쳐 현재까지 제적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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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을 체포해 조사하던 대전보안대 건물. 충남기업사 간판을 내걸고 운영됐다. 중구청 옆에 있던 해당 건물은 철거되었다 . (사진=대전시 제공)
▲시국사건과 탄압들

1980년 10월 유신헌법에 의해 성립된 전두환 정권은 1981년에 접어들자 정권을 비판하며 민주화운동권과 시민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해 대전·충남에서도 여러 시국사건이 발생했다. 한울회 사건(1981년 4월)을 비롯해 아람회 사건(1981년 7월), 충남대 청람회 사건(1981년 9월), 공주사대 금강회 사건(1981년 11월) 등이다. 대전지역 기독청년·학생들의 성서연구모임인 한울공동체 회원 30여 명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일부가 입건된 것을 포함해 가혹행위를 통한 허위 자백으로 반국가 이적단체를 만든 아람회 사건의 당사자들은 지금까지 피해 회복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당시 대전 중부, 서부경찰서, 청주경찰서, 충남도경찰국, 대전·청주보안대, 제3관구 및 제32사단 헌병대, 제3관구 보통 검찰부 및 군법회의 등에 대한 피해자 진술 청취 내용 및 기록 조사 등으로 행적조사 후 가해자를 특정해 조사가 추가로 이뤄질 예정이다. 충남지역 각 신문사 및 대학 학보사 당시 발간자료를 확보하고, 계엄 및 2군 상황일지, 3관구 계엄 사후 보고, 재판기록 현황도 파악해야 한다. 각 대학교 징계 및 재입학 심사기록, 충청지역 치안일지, 기소유예 및 재판기록 가해자 인적사항 등을 확인할 예정이다.

정성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은 "우리지역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32사단 입소기록이나 육군검찰의 충청지역 피해자 재판 기록 등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라며 "광주 밖 5.18을 주제로 보고서를 발간해 민주화운동이 우리지역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됐고,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필요성을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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