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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34- 충남 양반의 맛 '석갈비'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 승인 2024-06-10 17:08

신문게재 2024-06-11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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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신정호 닭석갈비. (사진= 김영보 연구가 자료 제공)
우리 속담에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기는 씹을수록 잇몸 사이에 육즙이 우러나 침샘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고기는 씹어야 제 맛이지만 갈비는 뜯어야 제 맛이 난다.' '양반 체면이고 뭣이고?'아니다. 양반 체면을 지켜가며 먹을 수 있는 '갈비구이'가 있다. 그게 바로 충청도 아니 더 좁혀서 충남의 '석갈비'다.

요즘 전국적으로 석갈비가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로 석갈비가 대세다. 큼지막하고 도톰한 갈비를 양념장에 재웠다가 큰 화덕에 숯불을 펴고 큰 석쇠에 갈비를 통째로 얹어 구운 다음 손님들이 굳이 굽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서 뜨겁게 달군 돌판 위에 익힌 고기를 올려 식지 않고 마지막 한 점까지 맛볼 수 있다.



석갈비는 미리 구워서 나가기 때문에 굽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식사시간도 줄일 수 있고, 일반고기 집처럼 식탁에서 뜨거운 열기를 얼굴에 쬐이거나 연기를 마시지 않는다.

이 '석갈비'는 예산을 중심으로 공주. 천안. 대전은 물론 충북에까지 번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된 충남지방의 양반들이 집안 잔치 때나 선술집, 주막 등에서 안주로 먹던 음식 중에 하나다.

지금이 어느 땐데, 석갈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양반타령인가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충남은 조선시대 전국에서 양반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구한말의 자료에 따르자면 양반 중에서 절반 이상이 충청도 출신이었다고 한다."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충남"이라고 답하면 '충청도 양반' 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한양과 지근거리에 있던 충남은 양반뿐만 아니라 낙향한 사대부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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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띠울 돼지석갈비. (사진= 김영복 연구가 사진 자료 제공)
낙향한 사대부와 그 가족들 그리고 양반들은 품위를 유지하며 이른바 행세를 하기 위하여 언행을 보통 백성과 달리하였다.

항상 말은 천천히 사려(思慮) 깊게해야 하고, 행동은 신중히 해야 했다. 이것이 관습화 된 결과, 충청도 사람은 모두가 느리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사대부와 양반들이 직접 불을 피워 연기와 냄새를 맡으며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것은 양반 체면으로 있을 수 없는 노릇인지라 그곳이 비록 주막이나 선술집이라 하드라도 머슴들이 미리 구운 고기를 뜨거운 불판에 올려 따뜻하게 먹었던 것이다.

이런 충남의 '석갈비' 조리법을 보면 옛날 양반네들이 먹던 '가리구이'와 비슷하다.

18세기 한중일(韓中日) 전체에서도 최고 수준의 학자로 꼽히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협(牛脅)을 갈비(曷非)라고 부른다고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시의전서(是議全書)』 음식방문에서는 '가리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가리를 두 치 삼사 푼 길이씩 잘라서 정히 빨아 가로결로 매우 잘게 안팎을 어히고(자르고) 세로도 어히고 가운데를 타(갈라) 좌우로 젖히고 가진(갖은) 양념하여 새우젓국에 함담(간) 맞추어 주물러 재여 구어라"고 했다.

1924년에 일제강점기, 요리책의 저자이며 조선가요집, 조선어사전을 편찬한 재야 학자 위관(韋觀)이용기(李用基, 1870~1933)가 출판한『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갈비구의'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협적(脅炙)'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이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여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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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갈비 소갈비구이. (사진= 김영복 연구가 사진 자료 제공)
그 조리법을 한 번 살펴보자. "기름진 연한 갈비나 암소갈비를 잘게 족이되 대가리는 질기니 내어놓고 한 치 길이씩 잘라서 물에 잠깐 씻어 베수건에 꼭 짜서 안팎을 잘게 어이되 붙은 고기를 발라가며 다 어인 후에 진장에 꿀과 배즙과 이긴흔 파와 마늘 다져 넣고 깨소금과 호초가루를 넣어 한 데 풀어 가지고 어인 갈비를 하나씩 들고 고명 풀어논 것을 안팎으로 발으되 짜지 않게 하여 담되 다시 켜켜로 깨소금과 기름을 쳐가며 재여 놓았다가 구어 먹나니 (중략) 대체 잘 쟁인 가리를 석쇠에 굽지 말고 번철에 기름을 붓고 바삭 지져 먹는 것이 좋으나 그러나 굽는 것은 기름기가 송알송알 하여 맛이 더 있는 것 같으니라."

이용기는 갈비구이를 먹는 모습만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대체 가리구의와 상치 쌈이라 하는 것은 습관으로 좋아서 편기를 하나 그러하나 이것을 안 먹는 사람이 보게 되면 오즉 추하게 보며 오즉 웃겠으리요. 그 뜨거운 뼈 조각을 좌우 손에 다가 움켜쥐고 먹는 것은 사람이 먹는 것 같지 않고"라고 했다.

위관 이용기는 당시 시대상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갈비를 손에 잡고 뜯어 먹는 것을 볼 상 사납게 본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 말 양반이 아니면 일반백성이 '가리구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는 것은 언감생심 (焉敢生心) 꿈도 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예산은 예부터 갈비구이는 물론 육회 등 소고기 요리가 잘 발달한 지방이었던 것 같다.

이렇듯 예산에서는 옛날부터 숯불에 구운 양반식'가리구이'가 유명하다.

갈비를 양념에 재운 다음 큰 화덕에 숯불을 펴고 큰 석쇠에 갈비를 통째로 구운 갈비를 다시 뜨겁게 달군 돌 판에 담아 식탁으로 옮겨 따뜻하게 먹던 방식 그대로 1942년 일제 강점기 예산 5일장 노천 좌판을 펼치고 고(故) 김복순 씨가 고기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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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소복갈비. (사진= 김영복 연구가 자료 제공)
이후 장사가 잘되자 예산읍 예산리에 건물을 얻어 '소복옥(笑福屋)'이라는 주막집을 차리게 되고,'소복옥(笑福屋)'은 소복식당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당시 소복식당의 대표 메뉴는 단연 양념소갈비이다. 소갈비는 소 한 마리에서 두 짝이 나오고, 갈비 한 짝마다 평균 14인분 정도의 고기가 나온다고 한다.

김복순 할머니는 슬하에 두 남매를 두었는데, 이후 딸에게 가업을 물려주었고, 2대 주인이 된 딸은 올케와 함께 소복식당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딸이 급환으로 작고하자 1983년 함께 일하던 올케 고(故) 이수남 씨가 가게를 이어받아 2006년 별세할 때까지 3대 주인으로 소복식당을 지켰다. 소복식당이 발전을 이룬 시기는 3대 이수남 씨가 운영할 때부터라고 한다.

1990년대 중반 옛 식당 건물인 기와집을 헐어내고 현대식 대형건물을 신축하였다. 지하를 갖춘 3층 규모의 대형건물 1층은 소복식당이 차지하고 2층과 3층은 예식장과 피로연장으로 꾸며 주말이면 하객과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2006년 이수남 씨가 별세하자 장남 김성렬 씨가 맡아 운영하였으나 벌려놓은 다른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운영권을 동생에게 넘겼다. 현재는 차남 김영호 씨가 부인 이지은 씨와 함께 현재 4대 대표로 소복갈비를 지키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창업주의 증손자이자 김영호 씨의 아들 김일겸 씨가 식당 일을 열심히 배우면서 5대를 잇는 가업 계승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이라고 한다.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식당에서 느끼는 공통점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최고로 신선하고 좋은 재료만을 선택하여 사용한다. 재료가 좋아야 음식의 질과 맛이 좋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좋은 재료는 당연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맛있고 좋은 음식을 대접받은 고객들의 입소문에 의해 당연히 매출증대를 불러와 제조원가를 메워주기 때문에 싸구려 식자재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재료는 가능하면 국산을 사용한다.

특히 한국 음식의 기본은 장맛이라 할 정도로 장류(醬類)와 양념이 이 집의 노하우라 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모두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므로 인공감미료나 공장제품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는 창업주 때부터 전하는 조리법을 고수하고 변함없는 맛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결국, 신선하고 좋은 식자재를 그날그날 구매하여 사용하고 직접 제조한 양념, 변함없이 고수하는 전통의 조리법과 맛의 유지는 음식점이 장수하는 비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랜 역사를 지닌 소복갈비도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음식점이다.

예산 소복갈비의 이런 변함없는 맛에 유명세가 더해 졌고 이 유명세와 함께 전국의 식도락가들은 물론 각계 유명인사들이 소복갈비를 맛보기 위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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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새이학석갈비. (사진= 김영복 연구가 사진 자료 제공)
이 집의 유명인사들 중 이야기의 중심이되는 분은 단연 박정희 대통령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유명을 달리한 날이다. 바로 이날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뒤 아산 도고별장으로 소복식당의 양념갈비 100인분을 주문해서 맛있게 드셨다고 한다.

이를 상기하듯 소복갈비의 간판과 매장 한쪽 벽면에는 '대통령의 맛집'이라는 글귀와 조그만 액자가 걸려 있다.

이후 전두환, 김영삼, 노무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도 직접 찾아와서 갈비 맛을 보았다고 하니 '대통령의 맛집'이 결코 허언은 아닌 듯하다.

어쨌든 암소 갈비를 양념에 재운 다음 큰 화덕에 숯불을 펴고 석쇠에 갈비를 통째로 얹어 구워낸 후, 맛있게 익은 갈비를 다시 뜨겁게 달군 돌 판에 담아 식탁으로 옮겨가는 충남 식 갈비구이는 석갈비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예산과 가까운 공주 천안 홍성 대전을 비롯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공주의 새이학가든, 예가촌, 수원 권선구의 공주 석갈비, 제천 산아래식당은 쇠갈비구이를 하지만 대전 대덕의 띠울 석갈비, 천안 태조석갈비, 홍성의 달평 석갈비 , 인천 계양 계산동의 홍가명가 궁 석갈비, 여수시 사계돈 등은 쇠갈비가 아닌 돼지갈비를 아산 신정호 석갈비는 닭을 석갈비로 내놓고 있다.

이렇듯 쇠갈비로 석갈비를 하는 곳은 주로 예산과 공주이며, 대전, 천안, 홍성 등은 돼지갈비로 석갈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석갈비의 특징은 어떤 재료를 굽느냐 보다 굽는 방식에서 온 조리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잘 양념한 갈비라도 열원이 참숯인지, 합성 숯인지, 오븐인지, 가스인지, 또 불판이 석쇠인지 철판인지에 따라서도 맛에 큰 차이가 난다. 잘 피운 참숯불에 석쇠를 달구어서 구운 다음 가열된 돌판 위에 고기를 올려 따뜻하게 먹는 '석갈비' 맛이 가장 맛좋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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