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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시리즈로 날아온 사랑의 박스에 반성문 쓰는 심정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4-06-12 00:00
거리를 나가 보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 꼬마서부터 남녀노소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 답답한 마스크로 모두 입을 가리고 있다.

아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코로나 탓인지 덕분인지 요즈음 사람들이 주고받는 얘기나 전화 내용은 십중팔구가 건강에 관한 얘기다. 다른 이야기도 있겠지만 코로나 관련 화제가 단연 ○순위가 돼 버린 셈이다.



요일제로 구입하는 마스크 3개를 약국서 사가지고 왔다. 잠시 후에 핸드폰에서 카톡 신호음이 들렸다. 택배회사로부터 날아온 카톡문자였다. 예정대로 오후 3시쯤 택배박스가 배달됐다.

인천 사는 하철옥 제자가 보내온 정성과 사랑의 선물이었다. 당시 구입에 제약을 받고 있던 마스크가 자그마치 50개짜리 3박스 150개, 항균티슈 4개, 손 세정티슈 4개를 보내온 것이다. 개봉된 택배박스를 바라보는 순간 울컥했다. 순간 참아내기가 어려웠는지 숨겨놓았던, 간기 있는 액체가 주르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해 전의 제자도, 특별한 사람도 아닌, 80년대 초·충고 3학년 때 담임했던 제자가 보내온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니, 수백 리 길 날아온 사랑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무슨 약속된 시리즈인지 사흘 후에 택배 소포 박스가 또 뒤를 이었다. 역시 근 40년 전 충고 3학년 때 담임했던 송재영 제자가 보내온 정성과 사랑의 박스였다. 꽁꽁 얽어맨 정성과 사랑의 택배박스를 앞에 놓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개봉을 해 보니 건강에 좋다고 하는, 요즈음 많이 권장하는 유기농 제품 식초를 경기도 용인시 소재 <초록마을> 제품 회사로 주문을 해서 보내온 것이었다.

< 조석으로 공복에 하루 2번, 한 스푼씩 물에 타서 복용하라.>는 카톡문자까지 곁들였다.

제자가 < 복용해 보니 활력이 생기더라. >는 정보까지 덤으로 챙겨 보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잊지 않고 옛 스승 건강까지 염려하고 챙겨주는 두 제자가 한없이 고마웠다. 요즈음은 경기가 좋지 않은 때라, 각자 살기도 어렵고, 가족들 건사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나까지 챙기는 천사 같은 마음이 가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에 천연기념물 같은, 따듯한 가슴들이었다. 아니, 하늘이 내려 준 용광로 가슴으로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옛 담임까지 잊지 않고 챙기는 그 마음에 가슴 한 구석이 느꺼워지는 감사함이었다.

아니, 울컥울컥하는 행복감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제자들 나이만한 때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반성이 되었다. 내 교직에 있을 땐 교과서적인 이론을 가르치는 데에 치중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세월이 부끄러웠다. 나는 글만 잘 가르치는 경사(經師)에 불과했다. 사람답게 사는 덕행을 가르치는 인사(人師)로 제대로 한 것이 없다. 교편 잡았던 과거가 뉘우침으로 나를 깨닫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그런 것들을 자랑스럽게 실천궁행(實踐躬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내 못한 것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일러 날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래서 스승보다 훌륭한 제자를 일컬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을 쓰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깨달음을 주는 제자들에게 부끄러워하면서 가슴 따뜻하게 살 것을 다짐해 본다. 공자의 삼인지행필유아사(三人之行必有我師: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란 말이 떠올랐다. 제자들 나이만한 때 나는 나 사느라 바쁘게만 뛰었다.

내가 그 나이에 해보지 못한 일을 가르쳐준 제자들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였다.

이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며 산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제자들한테서 받은 선물로 즐거움도 있었지만 부끄러움과 깨달음의 교화(敎化)가 더 큰 시간이었다.

감사함과 고마움 부끄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종시에 사시는 서옥현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마침 블루베리 철이고 해서, 형님 농장에 가 블루베리를 따왔다는 거였다. <그걸 쳐다보니 마침 내 생각이 나서 조금 가지고 오는 중이라. > 했다.

유성온천 전철역에서 내려 113번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 했다. 20분 후에 갈마아파트 3단지 버스승강장에서 만나자는 얘기였다. 예정된 시각이 조금 지났다. 서옥현 선생님이 버스에서 내렸다. 2㎏쯤 돼 보이는 플라스틱 박스에 블루베리를 가지고 오셨다.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생각하는 정성과 사랑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닌, 오로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했는데 그걸 바로 내가 실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사랑이란 세상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요 며칠 사이에 천연기념물 같은 따뜻한 가슴들로부터 무르녹는 시간이었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 늦깎이 부끄러운 둔재가 사랑의 늪에 빠지는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리즈로 날아온 사랑의 박스에 반성문을 쓰는 심정이었다.

따뜻한 가슴이 깨우침으로 오는 사랑이라면 천만 번이라도 반성문을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듯한 가슴으로, 사랑으로,

설익은 이 둔자(鈍者)의 가슴을 두드려

하느님, 부처님 가슴을 닮게만 할 수 있다면

수백 번이 아니라, 천만 번이라도 반성문을 쓰고 싶었다.

천둥 치고, 눈비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열혈 가슴 맥이 돌게 하고 싶었다.

용광로 가슴의 서옥현 선생님!

아니, 천연기념물 같은 장하고, 따뜻한 가슴의, 하철옥, 송재영 제자!

느꺼운 사랑에 감사하며 무지갯빛 행복감에 젖어본다.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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