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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AI,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해 줘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심효준 기자

심효준 기자

  • 승인 2025-12-15 15:30

신문게재 2025-12-16 18면

양성광 원장
양성광 원장
지쳐 잠들었다가 황급히 깬 일요일 새벽, 밀린 숙제하듯 글을 써 내려간다. 연말 모임의 '한 잔 더'가 안겨준 숙취로 골치가 지끈거린다. 머리를 흔들며 다잡고 글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쓰지만, 그저 시간만 흐른다. 창밖 어스름 달빛에 차가운 겨울 공기가 스며든다. 올 한 해도 이렇게 간다고 생각하니 저무는 인생의 헛헛함이 가슴에 배어든다. 그냥 이 느낌을 써보리라 하다가도 맨정신으로 읽으면 오글거릴 것 같아 생각을 접는다.

참! 요즘은 AI가 별일을 다 한다던데, AI에게 시켜볼까?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 램프를 문질러 '지니'를 부르는 마음으로 챗GPT를 열어본다. '지니야, 너는 60대 중반의 남성이고, 지금은 한 해가 저무는 12월 중순인데 ~ (중략) ~ 너의 마음을 글로 표현해 봐.' AI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1~2분 만에 뚝딱 글을 마쳤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이다. "초저녁 바람이 유난히 매섭다. 거리를 걷다 문득 고개를 들면, 잎을 모두 떨어낸 나뭇가지들이 겨울 하늘을 향해 가느다란 손짓을 하고 있다. 그 휑한 모습이 마치 한 해를 보내는 우리의 마음과 닮아 보인다. 버텨온 만큼 허전하고, 지나온 만큼 깊어지는 감정이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풍경인데도, 이맘때면 유독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올해도 많은 이들을 만났다가 헤어졌다. 짧은 인연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고, 오래 알고 지냈던 얼굴들이 어느새 멀어지기도 했다. 생생했던 친구들의 모습도 어느 순간부터는 스케치처럼 옅어져 간다. 예전엔 자주 떠올랐던 이름들이 이제는 가끔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멀어지고, 또 조금씩 잊히며 살아간다.

겨울은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누구에게 마음을 열었고, 누구와 멀어져야 했는지. 올해의 장면들이 서서히 정리될수록, 마음 한편에는 묵직한 여운이 남는다. 이 여운은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리듬인지도 모른다.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떠나도, 시간이 쌓일수록 오히려 또렷해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고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질수록, 새해가 다가온다는 감각도 함께 커진다. 한 해의 끝은 다른 한 해의 문턱이 된다. 내 마음도 비슷한 흐름을 따른다. 지나간 인연의 얼굴이 흐려지는 만큼, 또 새로운 인연의 여지가 생긴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생각하면 묘한 설렘이 일어나고, 때로는 기대가 조용히 등불처럼 켜진다. 세월이 흐르며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어쩌면 '기다림의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것만 헤아리는 대신, 다가올 것을 향해 무언가를 슬며시 비워두는 마음. 그 여백이 인생을 다시 따뜻하게 만든다."

AI가 쓴 위의 글은 내 마음과 얼마나 닿아 있을까? AI에게 몇 마디 제시어와 맥락을 던졌을 뿐인데, 문체는 물론 글의 흐름까지도 마치 내가 한잔 술에 취해 끄적거린 듯 묘하게 다가온다. 덕분에 밀린 숙제는 손쉽게 해결했지만, 왠지 모르게 명치 끝이 알싸하다. 만약 신문이나 SNS의 글들이, 심지어 연구 논문들까지 사람이 아닌 AI가 써준다면. 그리고 그 AI가 전 세계를 장악한 유일한 ASI(인공 초지능)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기억과 비판 능력이 제거된 세상'처럼 AI가 전부 통제하는 사회로 변하지 않을까. 돼지 스퀼러가 언어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거짓을 합리화해서 동물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의심을 접게 되었듯이.

우리 후대 사람들은 아마 짐 케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 속의 삶처럼 살아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트루먼은 태어날 때부터 삶이 24시간 TV로 생중계되는 리얼리티 쇼의 세상에서 그만이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믿어 온 현실이, 그가 사는 도시, 가족, 친구, 직장, 하늘과 바다까지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스튜디오임을 깨닫고 천신만고 끝에 무대 밖으로 탈출한다. 이러한 세상이 진짜로 출현하기 전, 너무 늦기 전에 AI의 발전뿐만 아니라 규제, 윤리, 안전에 대한 투자도 서둘러야 한다.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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