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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신채호가 천부경을 위서로 보았는가

양은모 세무사

제2뉴스팀

제2뉴스팀

  • 승인 2026-01-19 17:16
2025년 12월 12일 이재명 대통령의 환빠 언급으로 『환단고기』에 대한 진위논란이 다시 불이 붙었다. 이로부터 3일이 지난 15일에 유튜브 채널 '매불쇼'에 출연한 기경량 교수(가톨릭대)는 "단재 신채호 선생조차 (『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는) 천부경을 위서로 보았다"고 언급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과연 근대 민족사학의 거두인 신채호 선생이 실제로 천부경을 부정했는지 그 진실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독립운동가네 이관집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 초간본 30부 중 한 권을 전해받았다. 이관집 선생은 아들인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전해주었고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남한으로 가지고 내려와 대전에 정착했다.



오순제 교수(명지대 사학과 박사,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외래 교수)가 이유립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신채호 선생이 이관집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던 연변 지역에 방문하여 그곳의 소년단에게 역사 교육을 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단재의 저서 『조선상고사』를 보면, 북삼한설이나 연개소문의 사망연도 등이 『환단고기』의 기록과 놀랄 정도로 궤를 같이 한다. 단재가 『환단고기』원본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류를 통해 역사관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 선생이 과연 세간의 주장처럼 천부경을 위서라고 단정 지었을까?

우선, 기경량 교수 등이 근거로 삼는 1925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자.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史的)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 자(者)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관영통보(寬永通寶)가 기자(箕子)의 유물도 되며 십만 책의 장서루(藏書樓) 속에서 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진가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며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聖言)이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
1925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삼국지동이열전교정-조선조 연구초> 기사
전후 맥락을 살피지 않고 '후인 위조의 천부경' 구절만 떼어 놓고 본다면, 단재 선생이 천부경을 후대의 위조물로 단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배포되던 천부경의 복잡한 판본 상황과 단재의 '사료 비판' 관점을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송호수 박사의 정리에 따르면, 천부경의 판본은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6종에 달한다.



첫째, 태백일사본(1911): 계연수의 『환단고기』 합본. 둘째, 묘향산 석벽본(1917): 계연수가 발견하여 전수한 판본. 셋째, 최고운 사적본(1925): 김용기의 《단전요의》 수록. 넷째, 최문창후전집본(1925): 최국술이 정리한 판본. 다섯째, 노사 전비문본(1920경): 김형택의 《단군철학석의》 수록. 여섯째, 농은유집본(2000 공개): 고려 말 민안부의 유품에서 발견된 것이 그것들이다.

각 판본은 문구가 상이하거나 전래 경로가 다르다. 그리고 『태백일사』에 따르면 천부경은 환국 시대부터 구전되어 온 글로, 배달국 신지 혁덕이 녹도문으로 기록했고, 이후 고운 최치원이 한자로 번역하여 세상에 전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다양한 판본이 혼재하던 상황에서 단재 선생이 지적한 것은 무엇인가? 단재 선생이 말한 '후인 위조의 천부경'이 과연 천부경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시 여러 경로로 유통되던 특정 판본에 대한 경계였는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신채호 선생은 1925년에 동아일보에 기고를 한 후, 6년이 지난 1931년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아국은 고대에 진서(珍書)를 분기(焚棄)한 때(이조 태종의 분서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일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이 없이 고서로 신인(信認)할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국 서적은 각씨의 족보 중 그 선조의 사(事)를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진위의 변별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접양된 인국인 지나·일본 양국은 종고(從古)로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서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위서를 변인(辨認)치 못하면, 인증치 않을 기록을 아사(我史)에 인증하는 착오가 있다. (조선일보 1931년 6월 18일)"

이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①우리나라는 위서를 조작한 일이 없었다.

②근일에 와서 천부경 등이 출현했으나 고서로 신인하지 않고 있다.

③우리나라는 위서를 조작하지 않기 때문에 진위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다.

④중국에는 위서(위작된 사서)가 많다.

⑤중국의 위서를 변별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역사를 증명하는데 착오가 있다.

다시 요약하면 '천부경은 위서가 아니고, 중국에 위서가 많으니, 중국에서 위작된 책으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를 증명하는데 착오를 저지르면 안된다.'라고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1925년의 '위조' 언급과 1931년의 '위서 조작 없음' 언급이 상충된다며 단재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단재는 시종일관 같은 기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언급한 '후인 위조의 천부경'은 천부경이라는 텍스트의 뿌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당시 천부경은 여러 판본이 속출하고 있었고, 특히 1925년 김용기의 《단전요의》처럼 문구의 가감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판본들이 '단군왕검의 성언'이라는 이름으로 잘 못 유통되고 있는 '교정 및 전사(傳寫) 과정의 오류'를 엄하게 경계한 것이다.

즉, 단재의 지적은 "천부경이 가짜다"가 아니라, "변별력 없이 아무 판본이나 가져다 단군의 성언이라 믿는 것은, 일본 동전을 기자(箕子)의 유물이라 우기는 것[일본의 관영통보寬永通寶가 기자箕子의 유물이 되는 꼴]과 다를 바 없는 위험한 태도"라는 학자적 양심의 발로였다.

단재 선생이 일본의 '관영통보'를 예로 든 이유를 되새겨보자. 관영통보 그 자체가 가짜는 아니다. 다만 그것을 수천 년 전 '기자(箕子)의 유물'로 둔갑시키는 시대착오적 안목이 문제일 뿐이다. 천부경에 대한 단재의 태도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단재는 천부경이라는 고유 사상의 실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1925년 당시 우후죽순 나타난 판본들 중 '후인의 가공이 덧칠해진 판본'을 비판 없이 수용하여 단군 시대의 원형인 양 오인하는 학계의 미숙함을 질타한 것이다. 즉, 단재의 독설은 천부경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엄격한 거름망이었던 셈이다.

최근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 없이, 단편적인 구절이나 추정에 근거한 가설만으로 특정 문헌을 '위서'로 낙인찍는 것은 단재가 경계했던 '안목 없는 사학'의 또 다른 단면일지 모른다. 이제는 편견을 거두고, 단재가 그토록 강조했던 철저한 사료 비판과 민족 자강의 눈으로 우리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다.

양은모 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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