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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멍 때리기의 역설

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정바름 기자

정바름 기자

  • 승인 2026-03-17 17:10

신문게재 2026-03-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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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환 학사부총장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빨리빨리'를 외친다.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면 조급해하고, 신호등이 길어지면 괜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뉴스와 메시지를 확인하고, 점심에는 회의와 보고서에 쫓기며, 퇴근 후에도 쌓여 있는 알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시대, 그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멍 때리기'다.

사실 멍 때리기를 두고 '시간 낭비'라 하겠지만, 가장 사치스러운 휴식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고급스러운 행위다. 스마트폰 알림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눈동자가 소모되는 시대에,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이거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퇴근 후 집에 와서도 SNS로 분주하게 '휴식'까지 소비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이 와중에 멍 때리는 건, 말하자면 뇌의 스파 트리트먼트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쉼에도 효율을 따진다. 산에 가면 몇 시간 만에 완주했는지를 묻고, 휴가를 다녀오면 얼마나 알차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따진다. 심지어 휴식조차 스케줄링해야 마음이 놓인다. 이런 세상에서 멍 때리기는 계획 없는 반란이자, '빨리빨리'의 문화에 맞서는 소박한 저항이다. 조금만 쉬어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멍 때리기는 현대병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알림과 정보, 무한경쟁 속에서 잠시 멍하니 눈길을 풀어놓는 순간, 인간은 기계가 아닌 존재임을 되새길 수 있다.

요즘 종종 보게 되는 '멍 때리기 대회'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멍 때리는 시간을 갈망한다는 반증이다. 참가자들은 스마트폰도 내려놓고 단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데 몰두한다. 참가자들이 모여서 그저 넋 놓고 앉아 있는데, 그 장면을 보던 시민들의 표정도 어느새 멍해진다. 전염성이 있다. 멍 때리기야말로 가장 순수한 '국민 놀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멍 때리기가 '사치'가 아닌 '생존'의 기술임을 확인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멍하니 있을 때 뇌의 창의적 회로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이른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를 활성화한다고 한다. 외부 자극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내면의 생각, 자아 성찰 등을 할 때 기억을 정리하고 창의적 발상이 생성된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이 대개 샤워 중이거나 산책 중일 때라는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생각하지 않을 때 생각은 자란다. 빈틈에서 창조가 싹튼다는 말, 선조들이 말한 '무위(無爲)'의 지혜'도 같은 뜻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특히 멍하니 있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법하다. 그래서 멍 때리기는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창의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자격증 시대가 더 확대된다면, 멍 때리기 1급, 2급 시험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1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 눈동자 초점 풀기, 주변 소음 무시하기 같은 과제가 출제될지도 모른다. 합격자에겐 '21세기형 휴식 전문가'라는 칭호가 주어질지도 모르겠다. 김소월의 시에도 바람 부는 빈 들판이 있고, 헤세의 소설에도 강가에 앉아 흐름을 읽는 인물이 있다. 예술은 멍 때리기의 시간을 빌려왔고, 철학은 멍 때리기의 공간을 찬미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멍 때리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쉴 때조차 불안해하고, 멈추면 뒤처질까 조바심을 낸다. 하지만 달력에 빈칸이 있어야 약속이 들어가듯, 삶에도 공백이 있어야 의미가 채워진다. 멍 때리기는 바로 그 빈칸을 채우는 예술이다. 삶은 의도적으로 채워 넣은 시간보다 비워두었을 때 더 깊어진다. 멍하니 있는 그 짧은 틈새에서 우리는 다시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바쁜 오늘, 단 10분이라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누려보면 어떨까. 멍 때리기, 그 소박한 휴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품격 있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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