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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열망 담은 파리장서 서명 최익길 지사 등 현충일 국립현충원 추모

제71회 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 발길
'1년 6개월' 옥고 오하근 지사 추모회 이어져
이강년의병부대서 활약 윤희선 선열 증손자도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6-06-08 16:17

신문게재 2026-06-09 8면

제71회 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영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오하근 지사, 의병 활동에 헌신한 윤희선 선열,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 최익길 지사의 공적을 기렸습니다. 오하근 지사는 옥고 이후에도 후학 양성에 힘썼고, 윤희선 선열은 가산을 처분해 군자금을 마련하며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최익길 지사는 유림들과 함께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습니다. 후손들은 선조들의 독립 정신과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며 그 뜻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묘역을 참배하고 기록을 보존하는 등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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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근 애국지사의 손자 오원섭(74·사진 오른쪽 두번째)씨와 오하근선생 추모회 임원들이 6월 7일 대전현충원에서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1919년 경북 영주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1년 6개월 옥고를 치른 뒤에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아 마을에서 한학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셨습니다. 글에 눈을 뜨고 학문을 익혀 지금도 추모회가 농고 선생의 뜻을 잊지 않고 있죠."

제71회 현충일을 맞아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서 만난 농고(聾故) 오하근(吳夏根·1897~1971) 애국지사의 손자 오원섭(74)씨는 경북 영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할아버지를 꼿꼿한 선비였다고 소개했다. 오하근 애국지사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영주군 영주면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보름 뒤 영주 하리면 만세운동과 4월 9일 풍기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았다. 오하근 지사는 고종(高宗)의 국상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3·1만세시위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이후 고향에 내려와 사돈 박인서와 함께 영주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장날인 3월 21일 오후 5시 무렵 두 사람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두 사람의 선창에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뒤따랐다. 출동한 헌병들은 이들의 행진을 저지하였고, 무력으로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중단하지 않고 행진을 시도하였지만 현장에서 붙잡혔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오 지사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손자 오원섭 씨는 "한학을 공부하셔서 세계와 전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계셨고,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것과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고향 영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준비해서 실행하셨던 것"이라며 "옥고를 치른 뒤에도 젊은 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후학을 키우셨고, 그때 글을 배운 주민들의 후손이 농고 오하근 지사 추모회를 구성해 오늘도 함께 참배했다"라고 설명했다. 1913년 국내 최초 무장 투쟁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정윤선 회장도 이날 동행했다.

이어 윤희선(尹熹善·1872~1932) 순국선열의 증손자 윤이섭(71)씨도 이날 독립유공자 2묘역에서 참배했다. 윤희선 선열은 이강년(李康年·1858~ 1908)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소모중군(召募中軍)으로 임명되어 단양·제천·원주·영월·문경·영주·봉화·안동 등 충청, 강원, 경상도 등지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에 간섭했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윤 지사는 국권회복을 위해 1907년 이강년의 진에 참여해 대일항전에 나섰던 것이다.



증손자 윤이섭 씨는 "충북 수안보의 옛 연풍에서 거주하며 소모중군(召募中軍)으로 임명돼 단양·제천·원주·영월·문경·영주·봉화·안동 등 충청, 강원, 경상도 등지를 넘나들며 활동하셨고,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부대를 위해 물려받은 땅도 처분해 군자금으로 활용하실 정도로 헌신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5. 파리장서 원문(2)
국립한국문학관이 공개한 '파리장서'원본.
독립유공자 1-1묘역에서는 한국 독립의 당위를 적은 장서(長書)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 국제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독립을 실현하자는 계획을 실천한 최익길(崔益吉·1862~1937) 애국지사의 증손녀가 찾아왔다.

최익길 애국지사는 독립운동을 향한 유림의 대응으로 한국 독립의 당위를 적은 장서(長書)를 파리로 보내 국제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독립을 실현하자는 계획에 동참했다. 1919년 3월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이라고 불리며, 한국 유림이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하고자 전개한 외교적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장석영과 곽종석에 의해 한국 주권 침탈을 규탄하고 독립을 청원하는 내용을 담은 파리장서 초안이 완성되자, 유림 137명과 함께 장서에 연명(連名)하는 방식으로 서명했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지역의 만세시위에서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일부가 붙잡히면서 파리장서 사건이 발각됐고, 최 지사도 고초를 겪었다. 파리장서는 '파리평화회의'의 대표들을 향해 "진실로 만국이 평화하다 할진대 우리 한국도 만방의 하나이니 어찌 우리만 평화롭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했다.



남편과 아들(9)을 동반해 묘역을 찾은 최익길 지사의 증손녀 최경심(53)씨는 "저희 아버지가 파리장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고 수집해 이곳 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고, 가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책을 제작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조의 독립운동을 설명해주셨다"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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