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 장항항의 꼴갑축제를 찾은 방문객은 인근 한산면에서 삼국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한산모시의 역사적 가치와 국가무형문화재 방연옥 선생의 숭고한 장인 정신이 깃든 세모시 짜기 과정을 확인했습니다. 한산모시는 섬세한 직조 기술을 통해 명품 의복으로 완성될 뿐만 아니라, 영양분이 풍부한 모싯잎을 활용한 쫀득하고 향긋한 모시떡으로도 만들어져 지역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천의 한산모시는 여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전통 직조 예술과 건강한 식문화가 결합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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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시대. (사진= 김영복 연구가) |
꼴갑축제하면 우선 행사 명칭 때문에 웃음부터 나오지만 이는 꼴두기와 갑오징어의 첫 글자를 따 붙여진 이름이다.
행사장 한편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먹거리 부스가 길게 늘어서 있고, 어항식당 천막에서는 갑오징어와 각종 회, 해산물 요리를 즐기며 축제의 맛을 만끽할 수 있고, 서천 앞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수산물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는 점이 꼴갑축제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했다.
오다 보니 가까운 한산면에서 곧 제36회 한산모시축제가 열린다는 깃발이 도로 양편에 보인다.
그래서 온 김에 모시〔苧〕와 모시떡이나 취재해야 겠다는 생각에 한산면으로 향했다.
한산(韓山)은 '큰 고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며, '이 나라의 마을'이라는 뜻으로도 해석을 하나 '이름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해석된다.고 한다.
'한산'이라는 명칭은 고려 전기부터 사용하였는데, 한산면(韓山面)은 조선 시대 한산군(韓山郡)의 소재지였던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다.
특히 한산면에 들어서니 푸른 모시대가 바람에 흔들이며 맞이한다.
한산 지방의 구전에 따르면 한산모시는 삼국시대 때로 한 노인이 건지산에 약초를 캐러 올라갔다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여 이를 재배하여 모시를 짜기 시작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40승 백저포(白苧布), 30승 저포(苧布) 등의 기록이 보인다. 오늘날의 모시와 비교하면 18승 이상의 포가 되므로 매우 곱게 짠 것이다.
1454년(문종)에 편찬하였으며, 각 도(道)의 연혁·고적·물산(物産)·지세 등이 상세하게 기록한『세종실록지(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모시〔苧〕의 생산은 물론 모시포[白苧布]가 등장한다.
조선 후기 남인 실학자 반계(磻溪)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1656년(효종 7)에 편찬한 전국 지리지로, 사찬 읍지의 성과를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전국지리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충청도(忠淸道) 우도(右道)공주진(公州鎭) 한산군(韓山郡) 편 토산(土産)에 모시[苧]가 기록되어 있다.
1759년(영조 35) 5월~6월에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가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을 계비(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상·하 2책에 홍저포 겹휘건 1건과 백저포(白苧布) 3폭 보자기 1건, 흑저포 장삼(黑苧布長衫) 5, 홍저포 장삼(紅苧布長衫) 2, 황저포 장삼(黃苧布長衫) 2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모시옷을 염색하여 다양하게 사용했음을 알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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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 모시 전승관.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조선 후기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17년(순조 17)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 중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고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제8권 지관 수제(地官修制)에 '한산(韓山)의 모시 밭,'이 등장한다.
한산지방에서 다년생인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원료로 하며 모시껍질벗기, 모시쪼개기, 모시삼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의 과정을 거고운모시를 짜는 길쌈하는 1974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모시는 올의 굵기에 따라 '세모시[細苧]' '중간 모시[中苧]', '굵은 모시[막저]' 세 종류로 나눈다. 올의 굵기를 '새' 혹은 '승(升)'이라고 하는데, 가늘수록 숫자가 커진다. 새는 9승 이상의 가는 모시 올을 셀 때만 사용하고, 승은 9승부터 9승 아래의 굵은 모시 올을 셀 때 주로 사용한다. 세모시는 가장 가는 올의 세저로 짠 모시를 가리키는데 보통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한다. 한산세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늘고 곱기로 유명하다.
세모시[細苧]는 머리카락보다 곱게 짜여진 모시로 삼국시대에는 30~40승, 고려시대에는 20승, 조선시대에는 15승까지 세밀한 모시가 짜여졌다. 한산의 화양면이 중심이 되는 생산지이다. 현재 최고로 곱게 짠 것은 12승 모시이다. 광폭세포는 폭이 넓은 모시로 현재 한산지역에서 62cm까지 제직하고 있다. 저포교직은 모시와 다른 천연섬유와 함께 섞어 짠 옷감으로 저마교직, 사저교직, 면저교직 등이 있다. 면저교직은 춘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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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형문화유산 방연옥 할머니.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방 선생은 1947년 12월 16일 충남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36번지 옹근절 마을에서 부친 방자순 선생과 모친 박수영 여사의 2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선생이 모시 짜기를 처음 접한 것은 친정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모시 짜기를 하였는데 선생이 모시 짜기를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모시짜기기 정말 힘들다며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며 못 배우게 하셨다.
그러나 모시 짜기를 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란 선생은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6살 때부터는 바디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 짜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숙제보다 모시 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사실 한창 모시에 재미를 붙였을 때에는 학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모시 하는 것만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훗날 문정옥 선생께 모시 짜기를 전수 받을 때 이미 어머니한테 배운 바가 있어 보다 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선생의 나이 29살 되던 1973년 한산면 지현리에 사는 이소직 선생과 혼인하였다.
한산면으로 시집와서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 사는 문정옥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되었다. 문정옥 선생 댁에서 짬이 날 때마다 일을 도와드리던 중 문정옥 선생의 권유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1981년 생애 최초로 짠 모시 4필은 약 12만 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꽤 큰 금액이었다. 모시를 판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생활비로 가정경제의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실을 입술로 찢어 모시 섬유를 만드는 '모시째기'는 숙련도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한산모시의 '숨은 비법'은 이 모시째기에 있다.
모시풀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그것을 앞니로 쪼개는 과정은 입술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또한 여러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모시를 짤 때도 건조한 날에는 모시가 다 바스러져서 기후가 안 좋다 싶으면 한여름에도 문을 다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야 하나의 명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한산모시이다.
선생 역시 처음 모시 째기를 할 때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입술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라고 했다. 또한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불편함이 없도록 한산지역에서 모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치과에서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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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 모시 송편.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모시풀[苧草]로 베를 짜 의복을 해 입었다는 기록은 고문헌에 많이 보이지만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모시는 지혈작용과 뭉친 어혈을 푸는 약재로 사용되어 왔다.
한산모시짜기 전수관에서 나오니 가까운 곳에 '농업회사법인 한산 모시 식품'이 보인다.
건물 외관에 '모시떡'이라고 크게 현수막을 붙여 놔 금방 눈에 띄었다.
모시떡은 모시의 원료인 모시풀의 잎을 재료로 하는 떡을 총칭하는 말이다. 덥고 습하여 모시가 많이 재배되는 남부 지방인 충청도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주로 만들어 먹는다.
옛날 춘궁기가 있을 때, 이 지방에서는 흔히 해 먹던 긴요한 간식거리 중 하나가 모시잎 개떡이다. 가마솥의 보리밥 위에 얹어 쪄낸 향수가 그득하게 담긴 개떡은 쌀가루에 어린 쑥이나 모시 잎을 넣고 반죽한 뒤 아무렇게나 만들어 쪄낸 우리 고유의 떡이다. 반죽에 쑥을 넣으면 쑥개떡, 모시 잎을 넣으면 모시개떡이다.
모시떡은 모시잎을 듬뿍 넣어 짙은 초록빛을 띠며, 은은한 풀내음과 향긋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집의 모시송편은 세 개씩 포장하여 작은 박스에 담겨있다.
특히 모시송편의 종류는 소를 검은깨 넣은 것과 참깨 넣은 것 두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갓 쪄낸 모시송편은 뜨거울 때 먹어도 맛있지만, 찐 뒤에 약 30분 이상 서늘한 곳에서 식히면 떡과 소가 알맞게 굳어 쫀득함과 풍미가 극대화된다. 보통 소로는 검은깨나 참깨 외에도 지역 또는 떡집에 따라 동부콩, 녹두 등이 주로 들어간다.
모시떡은 모싯잎 송편이 가장 대중적이지만, 지역에 따라 모시개떡, 모시절편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모시의 풍부한 섬유질과 펙틴 성분 덕분에 일반 떡보다 식감이 훨씬 쫀득하며, 시간이 지나도 잘 굳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모싯잎은 건강식품으로 주목받을 만큼 영양분이 매우 풍부하다. 우유보다 칼슘 함량이 많아 뼈를 튼튼하게 하고,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장운동을 돕고 소화를 원활하게 한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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