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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태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
월드컵 축구는 11명의 선수가 공을 쫓는 경기를 넘어, 극한의 압박감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조직의 역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심리 실험장이다.
전술과 데이터 분석이 평준화된 현대 축구에서 최후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의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 즉 신뢰자본(trust capital)이다. 개별 선수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신뢰자본이 고갈된 팀은 다음 단계의 벽을 결코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번 월드컵은 보여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안타깝게도 대한민국과 브라질이었다. 대표팀 운영의 난맥상을 보인 우리나라는 대진 운 덕에 조별리그 통과는 물론 16강까지 기대했으나 졸전 속에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영원한 우승 후보'라 불리던 브라질은 브라질축구협회의 부패, 장기적 계획 부재 등이 선수 선발과 운영에 심각한 불신을 불러온 끝에 16강에서 떨어져 일찌감치 짐을 쌌다.
축구로는 세계 정상급이지만 신뢰자본의 쇠퇴로 경제 대국에서 밀려난 사례도 있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비옥한 팜파스 지대에서 생산된 농축산물의 대규모 수출에 힘입어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았던 세계 5대 부국의 하나였다. 하지만 100년 사이에 잦은 군사 쿠데타와 대중주의(populism) 정권의 반복적 교체가 국가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를 완전히 앗아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의 핵심 정책은 뒤집혔고, 사유재산권마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빈번하게 위협받았다. 법과 제도가 국민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변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국민은 국가 시스템이 공정하고 안정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무려 9번의 국가 부도를 경험한 나라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정치사회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책 '트러스트'를 통해 신뢰를 단순한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적 번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으로 규정했다. 스티븐 M. R. 코비는 저서 '신뢰의 속도'에서 조직의 신뢰가 높아지면 의사결정과 업무 속도는 빨라지고 비용은 낮아지는 '신뢰 배당금'이 생기지만 신뢰가 낮으면 '신뢰 세금'이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PR 컨설팅 기업 에델만은 해마다 국가별 신뢰도 지표(정부·기업·미디어·비정부기구의 평균 신뢰도)를 발표한다. 올해 조사 결과에서 우리나라의 점수는 46점으로, 조사 대상 28개국 평균(57점)을 크게 밑돌며 50점 미만의 불신 국가군에 속했다.
경제 양극화, 청년 고용 절벽,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가짜 정보의 확산 등이 신뢰 하락을 유발한 배경으로 꼽힌다.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둘러싼 선거관리위원회의 후진적 행태는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국가 차원에서 신뢰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은 단순한 도덕 재무장이나 계몽 운동을 넘어 제도적 기반과 구성원의 심리적 구조를 동시에 재설계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신뢰는 예측 가능성과 공정성이 담보될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원칙은 상황이나 권력자의 과욕에 따라 변질되지 않아야 한다. 법과 제도가 언제나 규칙대로 공정하게 작동한다는 심리적 확신이 뿌리내릴 때, 국민은 시스템 자체를 신뢰하고 개인과 나라의 발전에 에너지를 쏟게 된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신뢰자본이 붕괴한 사회에는 각자도생을 위한 단기적 이익 추구와 무사안일 등 자기 보호적 행동이 만연하고, 이는 다시 공동체 전체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결국 국가의 진짜 자산은 눈에 보이는 자원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서로와 제도를 믿고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힘, 바로 신뢰자본이다.
무너진 축대를 다시 쌓듯 신뢰자본을 두텁게 쌓아간다면 월드컵 4강도 국민소득 5만 달러 달성도 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위기에도 신바람이 나면 무서울 게 없는 민족이지 않은가. /김용태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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