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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한승문 책임연구원 |
그래서 그는 사람을 직무가 아니라 '역할'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가 꼽은 역할은 다섯 가지다. 새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프로토타이퍼(Prototyper), 그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으로 빠르게 만들어 내는 빌더(Builder), 복잡해진 화면과 코드를 정리하고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스위퍼(Sweeper), 만들어진 제품을 시장이 원하는 모습으로 계속 다듬는 그로워(Grower), 성숙한 시스템이 규모가 커져도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지키는 메인터너(Maintainer)다.
쉽게 말하면 집 짓기와 비슷하다. 프로토타이퍼는 '이런 집은 어떨까' 하며 스케치를 수십 장 던지는 사람이고, 빌더는 그중 하나를 골라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다. 스위퍼는 어수선한 동선을 정리하고 안 쓰는 방을 헐어 집을 가볍게 만들며, 그로워는 식구가 실제로 사는 방식에 맞춰 부엌과 거실을 고쳐 준다. 메인터너는 수십 년 동안 배관과 전기가 멈추지 않도록 지킨다. 한 사람이 시기에 따라 이 역할들을 갈아입기도 한다.
이 역할들은 엔지니어나 디자이너 같은 기존 직함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같은 디자이너라도 누구는 아이디어를 던지는 쪽에, 누구는 정리하는 쪽에 서 있다. 제품이 갓 태어났을 때는 프로토타이퍼와 빌더가 앞장서지만, 시장에서 반응이 오면 그로워와 메인터너가 합류하고, 스위퍼는 거의 모든 단계에서 필요하다. 그래서 한 사람의 역할도 프로젝트가 익을수록 앞에서 뒤로 옮겨 간다.
일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체르니의 팀은 제품을 내놓기 전에 두꺼운 기획서를 쓰는 대신 실제로 돌아가는 프로토타입 수십 개를 먼저 만든다. 정적인 문서와 그림으로 시작했다면 그 제품을 출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혼자 깊이 파고드는 일에서 여러 인공지능 도구를 동시에 부리는 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면서, 한곳에 몰두하는 집중력보다 여러 맥락을 빠르게 오가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이 구분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인공지능이 일의 무게중심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접받은 쪽은 아이디어를 내는 프로토타이퍼와 무에서 유를 만드는 빌더였다. 반대로 남이 어질러 놓은 코드를 지우고 낡은 기능을 걷어내는 스위퍼는 가장 저평가되고 가장 적게 뽑히는 역할이었다. 성과를 자랑하기 어렵고, 잘해야 "시스템이 안 멈췄다"는 평가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여러 팀이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만 경쟁하듯 끌어모으는 동안, 정작 벌인 일을 마무리할 사람은 늘 모자랐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몇 분 만에 시안을 뽑고 한 번에 수천 줄을 써 내려가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처음부터 만드는 일은 기계가 가장 먼저 잘하게 된 영역이 됐다. 모두가 여전히 더 좋은 아이디어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 정작 귀해진 쪽은 벌여 놓은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스위퍼라는 관찰이 나온다.
코딩이 사실상 풀렸다면 빌더와 스위퍼가 왜 필요하냐는 반문도 나온다. 체르니의 답은 클로드가 이 일들을 점점 더 잘 해내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손을 떼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계가 청소를 대신할 수는 있어도 책임까지 대신 질 수는 없다. 어느 코드를 지울지 판단하고, 인공지능의 오류를 알아채며, 잘못됐을 때 책임지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좋은 팀을 가늠하는 질문도 바뀔지 모른다. "프론트엔드 몇 명, 기획자 몇 명"이 아니라 다섯 역할이 균형 있게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직함이 흐려지는 자리에 남는 것은, 지금 이 제품 단계에서 필요한 역할을 누가 가장 빠르게 메우느냐다.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한승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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