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산 시인·대전대 교수 |
이런 추측들에는 사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추측을 하는 사람의 내밀한 욕망들이 작동하고 있다. 사실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 자기편에게 유리한 일을 사실로 믿으려는 심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진 일본 영화 '라쇼몽'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숲속에서 한 무사가 살해되고 그의 아내가 산적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무사의 아내와 산적 그리고 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이 법정으로 불려와 증언을 하게 되는데 세 명 모두가 그 상황을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 고민하던 판결관은 무당을 불러 와 죽은 무사의 혼령까지 불러내지만 이 혼령마저도 그 상황을 다르게 이야기한다.
산적은 정당한 결투를 통해 여자를 차지했지만 여자가 도망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무사의 아내는 남편에게 치욕을 당한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나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증언한다. 나무꾼은 여자가 두 남자를 싸우게 만들어 결국 한 남자가 죽은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죽은 혼령은 강간당한 아내가 자신을 배신하고 산적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에도 진실은 없고 모두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실제 사건을 각색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나무꾼마저 자신이 그 자리에서 단검을 훔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실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진실이 무엇일까? 과연 진실이 있기나 하는 것일까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모든 실화는 사실이 아닐 수가 있다.
사실을 전하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기 때문에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에서도 우리는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나 태도에 따라서 이 사건의 원인을 다르게 찾고자 한다. 사실보다는 각자의 욕망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사실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항상 음모론이 뒤따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힘 있는 욕망이 진실이고 성공한 권력이 진실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한때의 힘이 진실을 가릴지라도 결코 사실은 사실대로 존재하고 그 사실이 말해주는 진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진실을 찾는 노력을 멈출 때 사회는 병들고 타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각자의 욕망만이 난무하는 싸움터가 되고 사회구성원들 누구도 진실을 보지도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누구에게나 진실을 알 권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억압적인 독재 권력은 책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른다. 진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이, 우리 사회가 진실이 은폐되지 않는 참다운 민주 사회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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