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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한위수 변호사, 낮은 물 깊은 골

이승선 충남대 정보언론과 교수

이승선 충남대 정보언론과 교수

  • 승인 2017-05-23 15:41

신문게재 2017-05-24 22면

▲ 이승선 충남대 정보언론과 교수
▲ 이승선 충남대 정보언론과 교수
엊그제 봄 날 세미나가 열렸다. 흔한 풍경이 펼쳐졌다. 강의용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사회자와 발표자가 책상 하나에 앉았다. 다른 책상에는 토론자 두 사람이 자리했다.

사회자의 말 머리에 이어 발표자가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 정장 차림의 신사가 토론을 시작했다. 신사는 품에서 세 장짜리 토론문을 꺼내 조근조근 읽었다. 평가와 질문이 조리 정연했다. 신사의 토론이 끝난 뒤, 단아한 복장의 숙녀도 조곤조곤한 토론을 마쳤다. 평범한 행사로 여겨질 법한 그 세미나의 신사 토론자를 잊지 못한 까닭이 있다.

이렇다. 언론보도로 인한 피해자가 ‘공인’인지 여부는 언론소송의 핵심 질문이다. 명예를 훼손한 보도를 했다고 할지라도 피해자가 공인인 경우 언론이 면책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공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법원의 판례가 쌓이고 있으나 둘쭉날쭉한 면이 있다. 그 날 세미나의 주제는 ‘공인’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공인 연구가 어떻게 진행돼 왔는가를 성찰한 세미나였다.

보통의 세미나와 달리 사회자가 가장 젊었다. 발표자가 사회자보다 나이가 많았다. 숙녀 토론자는 사회자, 발표자 보다 나이가 많았다. 신사는 사회자와 발표자와 토론자를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았다. 토론자, 발표자, 사회자 순서로 나이가 젊어지는 구조는 이례적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정장 차림의 신사는 학계가 인정하는 공인 연구의 대가였다. 그는 사십 여 년 전 법학과 학생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의 민?형사 지방법원 판사를 지냈다. 사법연수원 교수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을 거쳤다. 서울고법 부장 판사를 마친 뒤 법무법인 변호사로 일해 왔다. 그는 전형적인 학자 법관이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법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학위논문은 선거구별 인구불균형으로 인한 선거권 평등의 위헌성 여부를 논했다.

무려 서른다섯 해 전 일이다. 이후 명예훼손, 프라이버시, 초상권 등을 연구한 논문을 수십 편 발표했다. 공인의 명예훼손 문제를 비교법적으로 연구한 논문도 썼다. 통신비밀 보호와 관련된 법적 문제를 규명해 한 해 한 명에게 주는 철우언론법상을 수상했다.

신사는 십여 년 전, 법조인과 언론인, 교수들로 구성된 한 학회의 학회장을 두해 동안 맡았다. 그의 인품과 학술적 역량을 높이 산 회원들의 간곡한 천거와 추천에 의해 신사는 회장에 선임됐다. 짜장짬뽕 골라먹듯 이곳저곳 학회의 여러 회장직을 전전하거나 두문불출하다가 갑자기 회장을 하겠다면서 선거직전 학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듣보잡식 학회장들과 품질이 달랐다.

성실하고 야무지게 학회장을 지낸 신사는, 그 학회의 젊은 연구자들이 진행한 학술 세미나에 단순한 토론자로 기꺼이 참여했다. 감히 말하건대 나이와 체면과 감투로 범벅이 된 한국의 여느 학술 행사장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골이 깊은 큰 산에서 솟아나 낮게 흐르는 맑은 물 같은 풍경이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발표자는 신사에게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신사는 자기가 앉았던 토론자용 의자를 제 자리로 정갈하게 밀어 넣은 뒤 청중석으로 표표히 걸어갔다. 정장의 신사는 한위수 변호사였다.

며칠 전 스승의 날 즈음해 은사님들 말씀을 다시 들었다. 은사님 한 분은 “학문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학자가 학자적 양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넘어선 무서운 경고였다.

진력을 다해 공부해야 하고, 공부를 해서 깨달은 것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다면 목숨마저 걸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가만히 돌아보면, 학자의 공부는 자신의 명예를, 자신의 전부를 거는 행위다. 공부해 얻은 이치를 사사로운 감투를 위하여, 혹은, 달콤한 재물을 취하려 당대 권력과 거짓되게 교환하는 일은 학자뿐 아니라 공동체의 비극이다.

강을 뒤집는 것이 강을 살리는 길이라며 헛된 정책의 그릇된 이론을 제공하는 따위의 일은 불량한 공부다. 목숨을 건 공부 이야기는 게으르고 용렬한 제자를 꾸짖는 은사님들의 죽비소리다.

학회장을 지낸 공부와 실무의 대가이면서 낮은 물처럼 학술 세미나의 일반 토론자로 나선 한위수 변호사의 자세를 우선 배울 일이다. 골이 깊어야 뫼가 높고 비로소 맑은 물을 품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이승선 충남대 정보언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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