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만약에

[만약에] 12. 곽자의가 노기를 홀대했더라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제일이다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1-15 00:00
곽자의(郭子儀)는 변방 민족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최고의 명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양귀비를 등장시키면 금세 더 잘 알 수 있는 현종 때 '안사의 난'이 발생한다.

안사의 난은 중국 당(唐)나라 중기에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일으킨 반란을 뜻한다. '안록산의 난'으로도 불리는 이 반란은 당시 당나라의 황제였던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일찍부터 야심에 찬 인물이었던 안록산은 당나라를 어지럽히는 원흉인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755년에 거병하게 된다. 안록산 군은 756년에 낙양을 순식간에 함락시키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각지에서 반군을 치기 위해 거병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이로 인해 안록산의 반군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안록산은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군하게 되는데 이에 두려움을 느낀 현종은 장안에서 서쪽으로 도망친다.

함께 도망치던 양국충은 봉기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고 양귀비 역시 난의 원흉이라 하여 죽음을 강요당해 자살하게 된다. 그녀의 최후에 관하여서는 많은 설(說)이 회자되고 있다.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양귀비가 너무나 아름다워 차마 죽이지 못해 양귀비로 위장한 시녀를 대신 목매달아 죽였다는 설도 없지 않다.

중국의 4대 미녀라고 하는 양귀비가 등장한 마당에 또 다른 미녀들의 최후를 되돌아보는 것도 흥미롭지 싶다.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로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져 결국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서시(西施)는 다들 알 것이다.

또한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인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한 미인 초선(貂蟬) 역시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에 걸맞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번엔 더욱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왕소군(王昭君)의 차례다.

화공인 모연수는 자기에게 재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궁녀들의 모습은 일부러 아름답게 그려서 황제에게 올렸다. 반면 그렇지 아니한 경우는 반대로 못나게 그렸다. 왕소군은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황제에게 간택되지 못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에 흉노의 왕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와 혼인 화친을 청한다. 한나라에서는 이에 왕소군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가는 날, 원제가 왕소군의 용모를 처음 보게 된다. 그리곤 빼어난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하면서 동시에 분노심이 폭발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모연수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 싫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돌이킬 수 없었다. 시집 간 지 2년 후 왕이자 남편이었던 호한야가 세상을 떠난다. 흉노의 법도에 따라 왕소군은 다시 호한야의 장남이자 새로 즉위한 복주루(復株累)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왕이 죽으면 그 본처의 자식이나 다음 후계자가 될 이와 결혼해야 한다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 왕과 혼인하여 다시 딸 둘을 낳았다. 남편에 이어 그의 아들과 다시금 혼인을 강요당하고 심지어 자식까지 낳아야 했던 그녀의 비극적 삶은 과연 누가 보상해야 하는 걸까.

왕소군을 향한 호한야 부자(父子)의 짜디짠 '왕소금 적인' 행패는 그녀 또한 너무도 일찍 이승과 이별하게 만든 계기로 작용했다. 아무튼 기세를 올리던 안록산 군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차차 약화되었다.

결국 안록산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757년에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된다. 이어 안경서는 759년에 안록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에게 살해되었으며 사사명은 761년에 아들인 사조의에게 살해된다.

안사의 난은 763년에 사조의가 자살하면서 평정되었으나 8년간 지속된 난으로 인해 당나라는 매우 피폐해졌다. 또한 이는 당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으로까지 작용했다. 곽자의는 당나라 화주(華州) 출신으로 자는 자의(子儀), 별명은 곽령공이다.

훗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서 '곽분양'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여 전쟁터에서 공을 쌓아 천덕군사(天德軍使) 겸 구원태수(九原太守)가 되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가 현종 때 안사의 난이 발생한 후 비로소 요직에 뛰어오른다.

삭방(朔方)의 절도사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난을 토벌한 그는 그 공으로 중서령(中書令)에 발탁되고, 나중엔 분양군왕(汾陽郡王)에까지 봉해졌다. 곽자의는 역대 중국의 과거 시험에서 유일하게 무과 장원 출신으로 재상에까지 오른 자였다.

또한 4대에 걸쳐 조정을 섬기며 두 번이나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곽자의는 최고의 명신이라 칭송받았고,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가 모두 입신출세하여 장수와 번영의 상징으로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관료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장수를 누렸을 뿐 아니라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세속에서의 복을 마음껏 누렸기 때문에 곽자의는 후대에 부귀공명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팔자 좋은 사람을 비유하는 '곽분양 팔자'라는 말이 나왔다.

곽분양행락도
▲ 작자미상, '곽분양행락도', 19세기, 비단에 색, 131×415cm. 삼성리움미술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곽자의의 삶을 병풍으로 형상화한 '곽분양행락도'가 크게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팔자 좋기는 곽분양이다"는 말이 나온 건 그가 85세까지 장수한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의 부과는, 그가 벼슬길이나 가정생활에서도 딱히 액운이 끼지 않았다고 해서다. 또한 늙어서는 백자천손(百子千孫), 즉 백 명의 자식과 천 명의 손자를 거느렸다고 할 만큼 후손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 같은 얘기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생선알도 아니거늘 어찌 그리 폭발적 가족의 확장이 가능할까? 어쨌거나 자녀는 다다익선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자녀의 출산은커녕 아예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금과 달리 우리 베이비부머 세대는 통상 서른 안팎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무조건'에 이어 '닥치고'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고 다(多)자녀를 보면 부모님들께서 더 좋아하셨다. 하지만 그 즈음 정부의 청맹과니 가족계획 기조는 "둘도 많다"를 넘어섰다.

심지어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아이를 많이 낳으면 마치 미개인인 양 치부하는 모양새까지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갈지자로 전개되는 와중에 빈부격차의 심화와 자녀교육비의 부담에 더하여 양육환경의 열악이란 삼중고의 쓰나미까지 몰려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와 취업난의 가중이란 부수적 어려움은 오늘날 결혼을 아예 포기하는 세대의 급증이란 어두움까지를 탄생시켰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저출산 대책에 무려 126조 원이나 퍼부었지만 결과적으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 것 아니겠는가.

다른 정책도 마찬가지겠지만 언 발에 오줌만 누면 동상에 걸리는 법이다. 정시퇴근과 저녁이 없는 삶의 연속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전형적 탁상행정의 답습이 될 게 틀림없다. 그간 국민도 잘 몰랐던 정부의 저출산 대책은 이제라도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아이가 없는 사회는 불행의 서곡이다. 아이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 이야기를 다시 곽자의에게 맞춘다. 그가 '백자천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또 다른 노하우에 관한 일화가 흥미롭다. 당나라 덕종시대의 간신 중에 노기(盧杞)라는 인물이 있었다.

성격이 음험하고 시기심이 많아 자기 뜻에 맞지 않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연로한 곽자의가 병환이 깊어지자 문무백관들이 모두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곽자의는 자신의 처첩들까지 모두 물러나게 하고 오로지 노기만 남게 하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면에서 자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노기를 홀로 남겨 독대하는 곽자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집안 식구들은 노기가 물러간 뒤 곽자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곽자의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노기는 외모도 못생겼지만 속도 음흉한 자다. 우리가 그를 보고 비웃었으니 훗날 노기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에는 우리 집안이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노기의 본색을 간파한 곽자의는 장차 닥칠지도 모를 집안의 재앙을 막기 위해 미리 노기에게 잘 보인 것이었다.

이쯤 되면 곽자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했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부에서 내로라하던 인사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찬다. 물론 죄를 지었으니 그에 상응한 죗값을 받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그 옛날 곽자의의 처신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왜 그를 본받지 못 했을까 라는 아쉬움은 분수처럼 솟구친다. 만약에 곽자의가 노기를 홀대했더라면 노기는 노기탱천(怒氣衝天)하여 곽자의 가문을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쑥대밭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홍경석-인물-210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