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민족 취재탐방기] 전통복장이 매력적인 土家族(토가족)

37. 토가족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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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인터넷 캡쳐
#마지막엔 공안들에게 연행되기도

말로만 듣던 소수민족 투자주(토가족·土家族)를 만나기 위해 멀고도 먼 길을 떠났다.

꾸이저우의 성도인 꾸이양(貴楊)에서 오전 10시 출발하는 옌허쎈(沿河縣)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표를 파는 아가씨 말로는 오후 4시쯤 도착한다는 얘기고 보면 6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지만, 이미 시외버스 시간표에 관한 한 믿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저녁시간까지만 도착하면 되겠지'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옆 좌석에 30대 전후의 청년이 힐끔힐끔 나를 곁눈질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장거리를 같이 갈 입장이고 보면 먼저 인사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악수를 청했다.

두 손으로 내 오른 손을 감싸주며 반가워 하는 청년은 沿河縣에 있는 중학교 영어 선생이라고 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꾸어런(한국인)?! 한꾸어런?!"하며 외친다.

차 내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돼 온다.

꾸이양(貴州)의 사투리를 섞어가며 큰 소리로 떠드는 총각의 얘기를 들으며, 이 친구 되게 요란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낮잠이나 실컷 자 두고 나서 천천히 인사를 나눌 걸! 후회가 되기도 했다.

두어 시간쯤 달렸나 싶었는데 몇 번인가 덜커덩 덜커덩거리던 버스가 길가 쪽으로 멈춰선다. 그러면 그렇지! 또 고장인 모양이군. 중국에 와서 시외버스를 늘 이용했지만 두 시간 이상 거리의 버스라면 한 번도 고장이 안날 때가 없었다.

사전 점검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들 같다. 꼭 고장이 나야만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이다. 장거리 버스는 늘 기사가 두 명이다. 그 중 한 명이 내려 차 밑을 검사하는 눈치다. 승객들도 하나 둘 밖으로 나간다. 저 멀리 농가가 보일 만큼 한적한 도로다. 내리자 마자 담배를 피워무는 사람, 주춤주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소변을 보는 남자들도 보인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도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이 없다. 장거리 버스라면 오히려 한 두 번쯤은 고장이 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달관하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느긋한 모습들 뿐이다. 앞 바퀴를 빼내고 또 안에 부속을 갈아 끼우며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했다. 비로소 궁금하다는 듯이 승객들은 차수리 현장으로 모여든다.

중학교 선생은 수다쟁이였다.

자기가 뭘 안다고 기사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이러쿵저러쿵 아는 체를 하더니, 승객들 앞에 서서 고장 난 내역을 설명까지 한다. 그러더니 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귀한 한국손님이 우리들과 같이 가고 있다면서 한마디 하고는 영어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자기가 영어선생이라는 것, 그리고 이만큼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가 나를 당혹케 한다. 갑자기 <아이 엠 스피크 잉글리쉬>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분명히 <아이 캔 스피크 잉글리쉬>라고 해야 맞는 말일 터.

그나저나 다른 승객들은 그저 영어라는 것 밖에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다행은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삐져 나온다.

내가 웃는 모습이 그에겐 더욱 자신감이 생겼나보다. 계속 영어랍시고 지껄이는데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촨글리쉬다.

저런 선생에게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시간 반 이상이 지나서야 버스는 다시 부룽부룽 시동을 건다.

이 버스는 한 시간 후 다시 길가에 멈춰 섰고 이번에는 두 시간 이상 수리를 끝내고서야 다시 출발, 이미 예정 도착시간보다 세 시간이나 지난 오후 6시가 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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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인터넷 캡쳐
#버스 전복 직전에 살아나

차는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산을 넘어야 할 모양이다. 영어선생이 내 걱정을 안다는 듯이 먼저 설명을 해준다. 언젠가는 새벽 두 시에 도착한 날도 있었다면서 오늘은 늦어도 밤 10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란다. 지금 넘어가고 있는 산이 해발 1,700미터 쯤 되는 험준한 산이라는 얘기까지도 잊지 않았다. 겨울의 꼬리 쯤 되는 이른 봄이라 차 안에는 냉기가 도는 상태다.

산 중턱을 오를 즈음에는 비가 내렸고, 이미 짧은 해는 서산을 넘은 후여서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속도를 줄이고 있다. 비가 멈추자 짙은 안개가 깔린다. 속도는 더욱 줄어들고 5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 속을 기어가듯 운행하면서 앞 쪽에서 마주 오던 차량과 만나면 더욱 조심스럽게 비켜가며 곡예 운전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기사였다. 잠시도 담배를 쉬지않고 피우는 모습이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보는 사람으로서는 불안하기만 하다.

짐작컨대 거의 정상에 올랐으리라 싶었는데 갑자기 꺼억꺼억! 하는 소리를 내던 버스가 돌연 멈춰서 버린다.

안개밭을 거의 벗어났는가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은 금방 판명되었다. 땅의 지표가 꺼지기 시작한 위험지역에 누군가가 조심하라는 뜻으로 돌멩이를 갖다가 선을 쳐 놓았건만 버스기사의 운전 부주의로 차가 위험지역에 들어서 버린 것이다. 물론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속도를 내면서 빨리 지나가 버려도 될 것을 겁이 난 기사가 그만 브레이크를 밟아 버렸으니 다시 시동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으리라.

꺼억 꺽! 꺼억 꺽! 하면서 차체 앞 부분이 조금씩 들어 올려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마 뒷바퀴 쪽에서 지표가 꺼지면서 차의 무게가 뒷 쪽으로 쏠리는 모양이다. 승객은 모두 27명에 두 명의 기사까지 합치면 29명, 이제 곧 차는 1,700미터나 되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것이고, 시체조차 찾기 힘들만큼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리란 생각에 미치자 뒷잔등으로 주르르 땀이 흐른다.

승객들은 모두 일어나서 그 와중에도 자기 짐들을 챙기느라 부산을 떤다. 맨 뒤 쪽에는 떠나올 때부터 부둥켜안고 쪽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빨아대던 젊은 남녀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난리법석에 가세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앞 좌석을 두 손으로 꼬옥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하나님! 하나님! 아직도 제겐 할 일이 조금 남았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녀석이다. 평소엔 제멋대로 살다가 위급하니까 하나님을 찾다니!) 그리고 입을 앙 다물었다. (지혜를 주십시오! 용기를 주십시오!) 염치없는 기도였지만 순간적으로 힘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진정하시오. 그리고 자리에 앉으시오. 짐은 그냥 놔두시오. 이제부터 한 사람씩 나가야 합니다. 기사! 어서 문을 여시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외치면서 기사를 보니까, 두 손을 운전대 위에 올려놓은 채 덜덜덜덜 온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한 번 문을 열라고 소리를 지르자 퍼뜩 정신이 돌아왔는지 보조 기사가 서둘러 문을 연다. 문 옆으로 다가가 우왕좌왕하는 승객들 뒷덜미를 쥐고 문 쪽으로 밀어냈다. 이미 차체 앞부분은 15도 각도 쯤 들어 올려진 상태였다.





#난리 북새통에 카메라 절도



승객들을 다 밖으로 나가게 하고 남은 기사 두 명에게 손짓했다.

"빨리 빨리 움직여!"

그들도 연신 내 눈치를 보며 앞으로 나온다. 옆에서 느낄 정도로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다.

두 명 마저 내리고 이제 마지막 내 차례다.

그런데 온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우선 발이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엎드려버렸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문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 몸을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이 안타까운 상황은 평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문 가까이까지 기어간 후 스스로 몸을 굴려 떨어뜨리는 일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차체는 상당부분 지표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내 몸을 끌어 당기는 바람에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다시 엉금엉금 기어서 사람들 쪽으로 나오는데 우뢰 같은 박수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앞 쪽에서 마주 오던 차량들이 줄줄이 멈춰선 채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비추고 있었고, 몇 명이 달라붙어 버스 앞 쪽에 밧줄을 잡아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다른 차들의 도움을 받아 버스는 다시 끌어 올려졌다. 뒷 차들이 밀려있는 바람에 서둘러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안개는 걷혔지만 내리막 길 역시 사람이 걷는 속도만큼 느리게 운행되었다. 온 몸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버스에 앉았으나 기력을 탕진한 탓인지 그냥 멍멍할 뿐이었다. 옌허쎈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10분, 승객들은 내리면서 하나같이 나에게 절을 하고 고마운 인사를 건넸다. 옆 좌석에 영어선생과 두 명의 기사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기사들이 고맙다며 늦었지만 저녁식사를 사겠다고 했다. 배낭을 챙겨들고 차에서 내리면서, 너희들도 오늘 고생이 많았다. 이 버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이나 찍자. 죽었다 살아난 기념으로 말이다. 하면서 배낭을 열고 카메라를 찾았는데 이게 웬 일이냐? 출발할 때 분명코 배낭 중간 쯤에 넣어두고 확인까지 한 카메라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죽느냐 사느냐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내 배낭을 뒤져 카메라를 훔쳐간 인간이 있다?!

이날 밤은 수다쟁이 영어선생의 막무가내 고집으로 그의 집에서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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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인터넷 캡쳐
#영화 세트장 같은 마을 전경

어제의 버스사건으로 기력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1시간 거리라는 소수민족 투자주(土家族)촌을 향해 떠났다.

대로변에서 버스를 내려 다시 30분 쯤을 걸어가니 고풍스러운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부락에 도착하면서 나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혹시 타임머신을 타고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사극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영화 세트장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부락 입구에서부터 안 쪽까지 길바닥은 간혹 흠집도 보이긴 했지만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깔려있고, 집들은 비록 낡기는 했지만 하나같이 고대 궁궐과 같은 모습이다. 게다가 낯선 외국인을 바라보며 오가는 부락민들은 민족 고유의 전통의상 차림들이어서 더욱 신기하게만 보였다. 다른 소수민족 탐방과는 다르게 일체 사전연락이나 도움 없이 찾아온 곳이기에 다소 모험이 따르는 방문이기도 했다.

촌장집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는 청년이 있었다.

불쑥 찾아온 나그네를 보고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촌장 부부가 반가워 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다. 이 부락에 외국인 특히 한국인은 처음이라면서 무엇때문에 왔는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편히 쉬었다 가라며 비워두었던 방을 청소해 준다.

하도 집이 크고 고풍스러워서 건축한 지 몇 년이나 된 집이냐고 물으니 한 500년 쯤 되었을 것이라면서 이 동네엔 이런 집은 보통이고 600~700년 된 집들도 수두룩 하단다. 오랜 전 옛날 호남(湖南)지역에서 이주해 왔다는 土家族의 역사.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유난히 부자들이 많았던 민족답게 이 마을 역시 300여 채가 넘는 덩치 큰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가운데서도 10여 채는 집 둘레에 성벽까지 세워져 있어 토호(土豪) 중에 토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 집들도 보통 2층으로서 아래층은 방만 6~7개가 되고 정원은 대리석을 기둥처럼(네모 또는 원형) 만들어 박았다.

오늘날 아무리 잘 사는 집이라도 이런 마당을 보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다.

2층은 대부분 비어있고, 아래층도 한 두 칸만 사용할 뿐 나머지는 옛날 가구들이 쌓여있는 채 거미줄만 무성하다. 이미 지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여나 골동품 전문가들이 와보면 군침을 흘릴만한 고가(古家)들이다.

또 한가지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가 묵게 된 촌장 집이 그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 졌다는 하룡(賀龍) 장군 (모택동을 도와 중국을 창건한 10대 원수 중에 한 사람)의 홍군 제4지대 본부 가옥이었고, 내 짐을 푼 방 역시 하룡 장군이 묵었던 방이라는 사실이다. 얘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문화혁명 당시 누명을 쓴 채 옥에 갇혔다가 비참한 일생을 마감한 하룡 장군은 사후 5년 뒤인 1974년에 명예를 회복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 집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받은 지 옛날일 것이고, 감히 이국의 나그네가 이 방에서 유숙이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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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인터넷 캡쳐
이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촌장은 외국인이 자기집에 찾아온 것 자체가 너무너무 기뻐 죽겠다는 표정이다.

홍군(紅軍) 제4지대 본부 겸 하룡 장군 숙소에 여장을 푼 것을 계기로 나는 홍군, 팔로군 등이 모택동을 정점으로 한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당시까지의 활약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귀주(?州)까지 밀고 들어온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홍군은 밀리고 밀리다가 이곳 토가족 부락인 치탄까지 후퇴, 마지막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는 것은 훗날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부락으로 들어가는 길은 한 곳 뿐이고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둘러 서 있다. 그리고 왼 쪽으로는 오강(烏江)이 도도히 흐르고 있어 부락자체가 천연요새라 할 수 있다.

하룡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적군의 배후를 공격하고는 잽싸게 이곳 치탄 부락으로 후퇴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 일본군을 괴롭혔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는 집 대문 위에는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홍군 제4지대 본부>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저런 과거사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주인 내외이고, 이웃들이다. 어쩌다 60이 넘은 노인들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물어보면 기억을 더듬어 어린시절을 추억거리로 들려준다.

<다음주에 계속>

김인환작가-118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 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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