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여론광장

[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직함 남발과 오용, 졸부의식 벗어야

양동길 / 시인, 수필가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7-06 00:00
어릴 때, 서울 갔다 온 사람과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서울 얘기로 싸우면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었어요.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과시하려는 사람도 많았지요. 거짓, 과장 등으로 허장성세虛張聲勢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품위나 품격을 높이는 것으로 착각했었나 봅니다. 지나고 보니 참 어처구니없다 생각됩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을 일컬어 졸부猝富라 합니다. 벼락부자라고도 합니다. 피와 땀 없이 얻은 부도 이에 해당합니다. 부자인 척 처신하는 것도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지식은 많으나 지성은 없는 사회, 한번쯤 생각해 보셨나요? 지식을 얻는 경로는 여러 가지지요. 세 가지 만남, 자연, 사람, 자신과 만나 얻게 되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가정과 학교생활을 통해 가장 많이 정보를 얻게 되지요. 대인관계나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오감을 통해 지식은 쌓이지요. 중요한 하나, 자신과 만나지 못하면 지식의 깊이나 지성은 쌓이지 않습니다.



지성과 교양부족을 졸부의 첫 번째 특징으로 꼽더군요. 세상을 만만하게 살다보면 성찰이 필요 없게 되나 봅니다. 갑자기 부자가 되어도 세상이 모두 내 손안에 있다 생각하나 보더군요. 부족한 것 없이 자라거나 살다 보면 지성과 교양이 부족하게 된답니다. 자신도 모르게 비논리적, 감정적이 되고, 즉흥적 사고와 행동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는 군요.

비슷한 말이긴 하나,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한다지요. 그게 졸부의 두 번째 특징이랍니다.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은 많지요. 소중한 가치가 얼마나 많은가요? 어쩌면,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지요. 졸부 근성은 졸부만이 갖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거리에 살아도 돈이 없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산속에 살아도 돈이 많으면 찾아오는 사람으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貧居鬧市無相識 富住深山有遠親, 明心寶鑑 省心篇)는 옛말이 있지요. 동서고금東西古今이 다를 바 없나 봅니다. 부자 근처엔 항상 수많은 사람이 서성이기도 하고, 고위층일지라도 부자가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가더군요. 모두 졸부근성입니다.

명품 예기 많이 듣습니다. 가방 하나에 몇 천만 원 하고, 수억 원 하는 자동차가 어떻고 등 헤아릴 수 없지요. 허영심에 초점 맞춘 고가정책이란 말까지 있지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치성 소비, 높은 가격에 잘 팔리는 물건을 '베블렌재화Veblen goods'라고 하더군요. 가격이 오를수록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과시적 소비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에 빠지는 것도 졸부라 한답니다.

졸부근성, 위상에 맞지 않는 행동거지나 미성숙하고 서툰 처신을 의미합니다. 모르는 사이 우리 모두 유한계급有閑階級?이 되었나 봅니다. 너나없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 처신이 우리사회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큰 딸의 땅콩회향 사건을 시작으로, 변호사비 회사 대납, 부인의 무지막지한 폭언과 폭행, 막내딸의 밀수와 탈세 사건, 회장 자신의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위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사기, 약사법 위반 혐의 등 졸부 행태를 빠짐없이 보이더군요.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입니다.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것은 아니나, 국가 기관을 총 동원하여 두들기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 하기도 하고,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들뿐인가요? 과시나 허장성세,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직함입니다. 둘 이상을 대표해서 하는 말이 '장'이지 않나요? 혼자 일해도 회장, 사장, 원장 등등 장입니다. 이름뿐인 조직의 장도 마찬가지지요. 직원이 없거나 있어도 한둘뿐이면서 실장, 국장, 처장, 총장 등 직함을 씁니다.

더 가관인 것은 마을회관이나 자체센터 등 작은 조직이나 기관에서 강의하면 모두 '교수'라 합니다. 필자가 알기로, 대한민국 교수는 대학이나 그에 준하는 고등교육기관에서 강의 하는 사람 총칭기도 합니다만, 교수professor는 원래 정교수를 의미하지요. 직위라는 말입니다. 아래로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 등이 있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하나의 교수를 탄생시키나요? 그를 하루아침에 가로채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가요? 시간 강사를 외래교수, 겸임교수 등 대학 스스로 이상한 말도 만들어 쓰더군요. 대학에서 강의하는 자체로도 얼마나 큰 영광인가요? 필자도 권위의식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직함에 맞는 권위는 있어야하고 마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직함 남발과 오용은 품위나 품격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권위를 실추시키고, 상호존중 사회관계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이도 하나의 졸부의식이지요. 결코 포장이 내용이 될 수 없으며, 내용을 대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사회가 거듭나기 위한 보다 깊은 성찰이 있었으면 합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