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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대학의 변신

이성만 배재대 교수

이상문 기자

이상문 기자

  • 승인 2018-11-1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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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만 배재대 교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던지는 질문은 오늘의 대학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학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대학의 시대적인 사명을 잃는다면,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처럼 결국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당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교육이 이를 극복할 대안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대학을 정 조준한 박근혜 정부의 2주기 대학구조개혁평가와 문재인 정부의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는 그래서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가 몹시도 그리운 공간이 되고 말았다.

21세기 전환기의 이러한 혼란스런 대학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대학시절에 읽은 '변신'의 주인공이 고뇌하던 현대성을 떠올리게 된다. 1915년에 나왔으니 거의 백 년이나 지났다. 카프카는 세기 전환기까지도 탈피하지 못한 비합리적 사회구조를 적나라하게 해체하고 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등장하는 폭력적 갑을 관계에서 고군분투하던 보험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퇴행성 관찰일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기 전환기에도 능동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모순적인 대학사회의 구조를 그레고르의 변신을 통해 변혁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세계관의 해체이다. 작품의 앞부분에서 "악마여, 제발 좀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라고 외친다. 이는 벌레로 변신한 자신의 상태와 관련해서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의 삶을 퇴고하며 고뇌하는 시도이다. 생각하는 벌레, 다시 말해 몸은 벌레이나 영혼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그레고르 잠자는 변신 이전의 부정하고 싶은 상태에서 벗어나 오히려 생각하는 동물로서 인간 존재의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판박이 생활을 하면서 벌레 같은 삶을 살던 과거와 벌레이면서 자신의 삶을 숙고하는 새로운 상태의 인간다운 삶을 사는 현재가 교묘한 교집합을 이룬다.

카프카는 자신을 등딱지가 달린 흉측한 벌레로 만들면서까지 기존 세계관에 도전하고 있다. 주인공을 향해 일방적으로 돌팔매가 날아온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삶에 맞서 미래 지향적으로 변신하려는 주인공은 표적이 되어 일방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시도가 가족관의 해체이다. 벌레가 된 잠자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자 가족으로부터 아들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늘 곁에 있고, 언제까지나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가족은 점점 지쳐간다.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혈연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는 한 가지 기술과 역량으로 같은 직업에서 버티기가 어려워지는 시대라고 한다. 절대적인 혈연관계가 파괴되듯이 평생직장이란 말도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개인은 특정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시대이다. 교육의 기회에 대한 불안보다 무엇을 왜 배워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목한 것은 가정이라는 '공간'의 해체이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 그의 가정은 아늑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집이었다. 그러나 가장인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이후 집이라는 공간은 먹고 살기 위해 낯선 이방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변신한다. 과거의 대학이 나의 전공, 너의 전공, 우리의 전공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오늘날의 대학은 나와 너가 얽혀 있는 전공, 나뿐 아니라 그도 참여하는 상호문화 공간, 곧 대학이 문화적 다양성과 결부하여 사회적, 교육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적, 실천적 공간으로의 변신과 묘한 병치를 이룬다.

이성만 배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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