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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필톡] 굿바이 필톡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19-12-25 11:40

신문게재 2019-12-26 22면

굿바이
한기가 코끝을 스쳤다. 동지를 이틀 앞둔 겨울 바람이 매서웠다. 앙상한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홍시가 애처로웠다. 손바닥만한 햇살에 의지해 마루에 앉았다. 적막감이 감도는 마당 그늘의 잔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풍상에 반질한 마루 끝을 손으로 문질러보며 그녀의 그림자를 찾았다. 김호연재의 탕탕한 음성이 동춘당 고택에 울려퍼지는 듯, 노인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호연재는 사회적 자아의 실현이 원천적으로 봉쇄됐던 유교적 질서 내에서 살았다. 명민한 젊은 여성이 맛보았을 절망감은 안봐도 뻔한 이치. 거칠 것 없는 군자의 기상을 지닌 그녀의 자의식은 당당했지만 남편 송요화의 방탕한 기질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겼다. 거기다 '이성(異姓)들이 모여 시고 짠 것이 가지런하지 않은' 시집살이의 고단함으로 창자 속에서 울화가 들끓었다. 속물들이라고 오만하게 씹어보지만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런 삶이었다.

호연재는 '삼종지도'라는 유교 윤리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방안에 갇혀 지내는 여성으로서의 신세를 한탄했다. 허나 결혼생활의 위태로운 혼란에도 불구하고 호연재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창녀와 뒹구는 남편의 패륜으로 속끓이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홀로 남은 방에서 시를 썼다. 글쓰기를 통한 성찰에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시집 사람들과의 불화가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다. 호연재는 그들과 함께 진창에 구르고 싶지 않았다. '생애는 석 자 칼/마음은 내건 등불'. 석 자 칼날로 둘러싸인 듯 위태롭고 고달픈 삶이었지만 정신은 등불처럼 높이 걸어두고 싶었던 조선의 여성. 호연재의 글쓰기는 세상의 부당한 폭력 앞에서 상처를 치유하며 인간 존엄을 지키는 여정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고택 마루에 큰 대 자로 누웠다. 투박한 나무에서 나는 오래된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내가 나고 자란 집 마루에서의 책 읽기는 큰 즐거움이었다. 궁색한 집의 마루가 오죽하겠냐만 활자에 중독된 나는 마루에 누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탐독했다. 중 3때 대학생 오빠가 사다 놓은 『창작과 비평』은 사춘기 소녀의 의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금박의 제목이 박힌 시커먼 양장본의 두꺼운 전집이 책꽂이에 꽂힌 윗방은 신세계였다. 나는 그곳에서 당대의 지식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덕분에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슬픈 날에 떠든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로 우리를 야단쳤던 영어 선생님의 무지를 알게 됐다는 얘기다. 박정희의 야만적인 유신과 제주 4.3,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한국전쟁 그리고 마르크스와 민중이라는 지식의 거대담론에서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체득했다.

대전 대흥동 어느 골목 입구에 여름 내 박하 풀이 무성했다. 누군가 집에서 기르던 걸 흙 더미에 내다 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버려진 풀은 태풍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일어섰다. 풀은 천지간 구분 못하고 시퍼렇게 자랐다. 악착같은 생명력은 드디어 진한 향을 온 몸으로 뿜어냈다. 바람없는 천지에 꽃은 피지 않는 법. 외로움과 상처의 풍경은 도처에 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약자는 더 약한 자를 괴롭히는 세상이다. 루소는 인간의 역사를 "문명의 진보에 따른 도덕의 퇴화로 얼룩진 불행과 악덕의 창궐의 대서사시"라고 규정했다.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을 비웃고 조롱하는 시대에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고통을 느끼는 용기를 갖고 싶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해야 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말이다. 그것이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재주로 1년 3개월 글쓰기의 복을 누렸다. 굿바이 2019, 굿바이 필톡.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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