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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양동길 / 시인, 수필가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2-05-27 10:17
날씨도 청명하고 사람들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 여전히 감염자는 존재하지만, 한 달 전보다 훨씬 더 활력이 넘친다. 진정한 박멸이 어렵다는 소식이 있어 난감하지만, 몸이 앞서 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부터 해방이 되어 감을 느끼게 된다.

모처럼 문화답사를 하게 되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을 찾다보니 예산 지역으로 정하였다. 기초단체 지역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문화유산을 모두 둘러보기는 불가하다. 특히 예산에는 선사유적부터 삼국시대 축조된 많은 산성, 수덕사 등의 각종 사찰 유적, 예산향교를 비롯한 유교문화, 추사고택으로 유명한 고건축 물, 최익현 묘 등의 묘소,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유적 등이 즐비하다.

부득이 예당저수지, 추사고택, 수덕사, 윤봉길의사 유적을 선택하여 돌아보기로 하였다. 모두가 훌륭한 문화유산이나 하나만 먼저 소개해보자.



마지막 코스가 윤봉길(尹奉吉, 1908 ~ 1932, 독립운동가)의사 유적이었다. 의사는 25년 짧은 생을 오직 국가민족을 위한 헌신으로 보냈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을 지켜보며 노예교육을 배격하고자 자퇴한다. 동생과 한학을 공부하고,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힌다. 중언부언하기보다 다음으로 대신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시양리에서 태어나 19세에서 23세까지는 젊은 농민운동가로서 불같은 정열을 기울였다. 문맹퇴치와 농촌의 부흥 등 애구애족사상의 배양을 통하여 독립원동으로 유도하려고 한 것이다. 21세 때 농민독본을 편찬하여 민족사상과 정치경제의 지식을 교양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게 된 23세의 윤의사는 2월 7일 국회에서 보람찬 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고향을 떠나 만주도 청도로 전전하다가 24세 8월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의 김수 선생을 찾고, 요인들과 만났다. 25세가 되자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의거의 사명을 받았다. 29일 은 홍구공원에서 일본군의 전승과 일본천화의 생일을 위한 대축하식이 거행되는 날인 데 윤의사는 식장에 다가들어 폭탄을 던져 시리까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이하 군국침략의 수뇌를 일거에 숨지게 하고 중상을 입힌 후 마침내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교외의 형장에서 장렬한 최를 마쳤다. 이 소식은 세계를 뒤흔들어 세상 사람을 감격케 했다. 젊음을 바친 이 의거는 민족의 자랑으로서 길이 역사에 빛날 것이다."

대전 충무체육관 앞에 있는 <윤봉길 의사 상>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글은 이숭녕(李崇寧, 1908.7.5. ~ 1994.2.2. 국어학자), 글씨는 서희환(徐喜煥, 1934 ~ 1995, 서예가)이 쓴 것으로 되어있으며, 조각은 강태성(1927 ~, 이화여대 명예교수) 작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세웠다.

생뚱맞게 '윤봉길 의사 상'을 들먹인 것은 모두가 찾아보았으면 하는 속내 때문이다. 동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우연히 갔다가 만나 계면쩍었던 기억이 있다. 매헌의 행보는 우리 생각 이상의 위대한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농촌 계몽운동, 독립운동을 하였다. 폭탄 투척할 때에도 치밀한 연습과 계획,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투철한 의지가 있어 성공할 수 있었다. 동상 곁에 함께 새겨져 있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글은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나서면서 남긴 것이다. 결연한 의지가 그대로 담겨있다.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이란 말이 떠오른다. 거기에서 나아가, 개인의 희생으로 나라를 살리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다.

당연히 충의사에도 동상이 있다. 천안의 '독립기념관', 서울 양재동 '윤봉길의사기념관' 등 전국의 4곳에 있어 온 국민이 기리도록 하고 있다. 대전 충무체육관 앞에 있는 동상은 1972년 5월 23일 제일 먼저 세워진 매헌의 1호 동상이다.

윤봉길
대전 충무 체육관 앞 '윤봉길 의사 상'
체육관 앞에 세워진 것도 의아 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매헌은 탄생지 부근의 수암산 이름을 딴 '수암체육회'라는 친목 운동 단체를 만들어, 근대 스포츠와 그를 즐길 수 있는 체육활동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충청도가 낳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기림에 있어, 당시 도청 소재지였던 대전을 선택하고, 운동과 관련지어 한밭운동장 충무체육관 앞에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인류의 삶은 부단히 발전해 왔지만 아직도 수많은 난제가 쌓여있다. 가까이는 우리 스스로도 갈 길이 막연한 경우가 있다. 역병으로부터의 독립을 맞이하다 보니 윤봉길 의사의 독립정신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역사로부터의 독립, 문화 독립이 있어야 진정한 독립이 아닐까? 매사에 목숨 걸 필요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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