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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속의 애틋함…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최고의 작품

[백영주의 명화살롱]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화가의 어머니'

백영주 갤러리 ‘봄’관장

백영주 갤러리 ‘봄’관장

  • 승인 2014-08-20 11:39
▲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화가의 어머니>,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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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화가의 어머니>, 1871


"미술은 미술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림 자체의 미학적인 면 우선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통찰력 있는 인물표현… 인상적인 구도·색채조화 이뤄져
검소하고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어머니… 미국 어버이날 기념우표로 발행되기도



대부분 ‘어머니’를 떠올리면 애틋한 감정을 떠올린다. 피터 드 호흐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와 같은. 하지만 휘슬러의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화가의 어머니>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그림 속 어머니도 자애롭기보다는 팍팍한 삶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는 이 그림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 주 제목인 ‘배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피터 드 호흐,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1658~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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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드 호흐,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1658~1660

미국 태생인 제임스 휘슬러는 젊었을 때 군대를 동경했으나 자유를 갈망했기에 회화를 시작했고, 1855년에 유럽으로 건너가 평생을 살았다. 파리에서는 글레이르 문하에서 드가와 마네의 이론을 공부했다. 살롱에 작품을 내놓았으나 낙선했고, 1863년에 〈백색 교항곡 1번: 흰옷 입은 소녀〉를 출품했으나 또 낙선했다. 그리고 유명한 1874년의 낙선 화가 전람회에 그 작품을 내놓았다.

훌륭한 초상화가로도 유명하지만 휘슬러는 주제를 특별히 여기고, 또 세부 묘사에 치중하는 당시 영국 미술의 움직임에 반대되는 전체 분위기를 중요시했다. 또한 그는 뛰어난 수완과 매너리즘 성향을 지닌, 장식적인 옷을 즐겨 입는 화가로 유명했다. 휘슬러에게 이런 옷차림은 자신의 예술성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을 가냘프고 우아한 나비로 형상화했고, 1860년대 이후 자신의 모든 작품에 서명 대신에 나비 문양을 그려 넣었다.

휘슬러는 미술은 미술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풍경화든 초상화든 가리지 않고 그림 자체가 갖는 미학적인 면을 우선시하였다. 색채와 형태의 완벽한 배치에 전력을 기울인 결과, 그런 접근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화가의 어머니>다.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통찰력 있는 인물 표현과 인상적인 구도, 색채의 조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음악같은 제목과 일관된 하나의 톤 등 휘슬러가 엄격하게 고수했던 미학적 신념에 철저히 따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휘슬러가 뉴욕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 때 그녀를 모델로 그렸다.

늙은 어머니가 모델로 오래 서 있는 것을 힘들어했기 때문에 앉은 자세로 작품을 구성하였다. ‘어머니’라는 주제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냈기에 이 작품은 미국 어버이날 기념우표로 발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휘슬러가 작품을 그릴 당시 중점을 두었던 건 어머니가 아니라 화면의 조형 요소를 이루는 액자, 커튼, 벽 등의 오브제 구성과 배치, 회색·검정·흰색의 색채 배열이었다. 이를 통해 휘슬러는 화면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 휘슬러, <백색 교항곡 1번: 흰옷 입은 소녀〉,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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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슬러, <백색 교항곡 1번: 흰옷 입은 소녀〉, 1862

휘슬러의 '뮤즈 였던 조안나… 그녀를 모델로 한 '백색 교항곡 1번: 흰옷 입은 소녀'

화가의 의도는 작품 제목인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에서도 드러난다. 휘슬러의 작품은 이처럼 대부분 추상적인 제목을 달고 있으며 작품 소재에 따라 부제가 달린다. 그가 미술 작품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고정된 내러티브나 배경을 지니고 있는 현상이나 대상의 묘사가 아니라,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순수한 색채와 형태의 조형적 요소다. 그는 내용으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닌, 음악과 같이 미술도 색채와 형태의 조형적 요소만으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휘슬러가 추구했던 미술은 이후 추상화를 감상하는 데 적용된다. 가라앉는 색채, 반듯한 직사각형 액자와 어머니의 반듯한 자세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넘어 조용한 청각적인 감각까지 전달한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에 노쇠한 어머니가 모델이 되어 단정하면서도 한없이 가라앉는 분위기의 그림이 되었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땐 느끼지 못했던 화가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연민이, 비로소 느껴졌다.

백영주 갤러리 ‘봄’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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