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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3월9일:2002년 중광 스님 "괜히 왔다 간다"

김은주 기자

김은주 기자

  • 승인 2016-03-08 17:27


나는 걸레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 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나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 독주 한통 싣고/ 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떼들이 모여 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오/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잔/ 꺽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나는 걸레



詩 처럼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살다가 14년 전 오늘 하늘로 간 '걸레 스님' 중광.

반라의 몸에 검은 물감을 칠하고 누워있는가 하면 자신의 성기에 붓을 매달아 선화를 그리기도 하고, 본인의 제사를 지내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 그는 분명 미치광이 이었다. 그러나 검은 물감 속에 감춰진 스님의 해맑은 웃음은 광인의 모습 보다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짓궂은 얼굴이었다. 그림 ‘동심’의 동그란 검은 눈동자와 동그란 빨간 입술은 그래서 미소를 짓게 한다.

중광 스님의 집은 제주였다.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를 거쳐 1963년 경남 통도사에 출가를 했다. 그러나 종단의 승려임에도 형식의 틀에 얽매임 없이 파격적인 기행을 일삼다가 1979년 승적에서 박탈당했다.

美 캘리포니아 주립대서 강연 중 여학생에 키스를 하는 등 스님의 기행에 부처님도 손 놓아 버렸나 보다. 그리고 죽어서야 승적이 회복돼, 다시 부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인, 이단아, 파계승으로 불리며 종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 조차 아웃사이더로 취급 받았던 중광 스님은 그러나 美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교 루잉스 랭커스터 교수가 ‘한국의 피카소’로 소개할 만큼 창조적인 예술가였다.

당시 미술교육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그에게 학벌과 파벌로 똘똘 뭉쳐있던 미술계에서는 그의 자리는 없었다. 중광의 예술은 그래서 더 자유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생전에 입버릇처럼 “나 죽거든 절대 장례식 하지 마라. 가마니에 둘둘 말아 새와 들짐승이 먹게 하라”는 유언은 영혼마저 자유로웠던 면모를 보여줬다.

2002년 그가 숨을 거두고 유언과 달리 5일장에 다비식이 거행됐고, 그와 추억을 함께 했던 지인들이 찾아와 창과 춤사위로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의 인생과 가장 맞닿은 장례식이 아니었나 싶다.

‘괜히 왔다 간다’는 비문을 남기고 떠나 부처님 앞에 다시 합장한 스님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부처님의 ‘껄걸’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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