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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소리] 복지전달체계 중심은 '사람'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정책연구팀장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정책연구팀장

  • 승인 2016-03-16 14:50

신문게재 2016-03-17 23면

▲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정책연구팀장
▲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정책연구팀장
육아문제로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무직자가 된 내 처지를 절절하게 느끼게 해 준 것은 건강보험증이었다. 남편의 이름 아래로 내 이름이 적혀진 보험증은, 이제부터는 내가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세대주인 남편의 피부양자로서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세대원이 되었음을 웅변해 주었다.

영국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국민건강서비스 등록증'(NHS medical card)을 받았을 때, 10살, 9살에 불과했던 아이들에게도 자기 이름만 올라간 개인별 카드가 나온 것이 신기했다. 이 카드는 주민등록제도가 없는 영국에서는 실질적으로 개인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 사람의 부양자나 세대주 같은 정보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가문이나 가족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근대를 연 사상적 기초이자, 여성이나 어린이 같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 신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복지시스템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자 규정은 물론이고, 복지 전달체계 전반에 걸쳐 개인이 있어야 할 자리를 가족이나 가구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통합사례관리사업을 예로 들어보자. 통합사례관리는 '복합적 욕구를 가진 대상자에게 통합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정서적ㆍ경제적ㆍ신체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대전에서도 '희망티움센터'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추진 중이며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사례관리에서조차 행정적인 관리는 '가구'를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제 업무량이나 서비스 내용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에 중구와 대덕구에서 사례관리를 받았던 대상자의 평균 가구원 수는 2.5명으로 66.8%는 가족이 있었으며 가구원수가 4인 이상인 경우도 22.4%에 이르렀다. 대상자의 대다수가 가족 간의 갈등이나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가족이나 가족 전체가 함께 사례관리를 받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통합사례관리사업을 관장하는 희망복지지원단의 업무매뉴얼에는 통합사례관리사 1인당 월평균 20가구를 관리하도록 되어 있지만 20가구만을 관리해도 실제로 사례관리를 받는 사람은 그 2배가 넘는 40~50명에 달한다.

가구 단위 관리 시스템의 더 심각한 문제는 복지서비스를 '가족 단위'로 제공한다면 훨씬 적은 자원만을 투입해도 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봐도 '위기가정'에 대한 지원을 강조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개개인이 받던 복지혜택을 가구 단위로 재편해서 복지지출을 줄이려는 때와 대개 일치한다.

영국 보수당의 캐머런 총리는 집권 다음 해인 2011년부터 '문제가정(Troubled Families)'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실직, 가정폭력,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 자녀의 무단결석이나 비행 등의 '문제가 있는 가정'에 정신건강서비스, 취업 및 학교 복귀 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족 단위 지원 프로그램으로 영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5년 3월까지 10만5000여 가정이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종합적인 지원을 통해 '아이들을 학교로, 부모들은 일터로' 보내겠다는 이 원대한 계획은 시작할 때부터 언론과 시민단체의 공격을 받아왔다. 비판의 요지는 첫째, 사회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문제를 '가정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가족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정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 둘째는 가족을 지원의 단위로 삼음으로써 개개인이 받는 복지서비스를 줄이는 방편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 정부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성과로 복지지출 절감을 드는 것을 보면 이러한 비판이 기우만은 아닌 듯하다.

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나라들일수록 복지 전달체계의 중심에는 가족이 아닌 개인이, 가구가 아닌 사람이 들어 있다. 4인으로 이루어진 한 가구가 아니라 한 가족을 이루고 사는 4명의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 이것이 복지 전달체계 정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정책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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