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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7월4일:‘방사능의 어머니’ 퀴리 부인, 불륜을 저질렀다?

1934년 남편 '피에르' 곁으로

김은주 기자

김은주 기자

  • 승인 2016-07-03 20:00
▲ 마리 퀴리 합성 사진
▲ 마리 퀴리 합성 사진

퀴리 부인으로 잘 알려진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를 ‘방사능의 어머니’라 부른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노벨상(물리학상, 화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을 가진 퀴리 부인(이하 마리)도 그 시대에 여성과학자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두 번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록은 역사서에 오르지 못 했을 수도 있었다.

1898년 방사능 물질인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마리는 1903년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연구를 처음으로 진행했던 마리의 이름은 원래 명단에 없었다. 당시 그녀는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라듐과 폴로늄의 분리 과정은 단순 작업으로 치부했기에 명단에서 제외됐다. 그녀의 남편 피에르 퀴리(이하 피에르)는 적극적으로 탄원서를 냈고, 결국 부부 공동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노벨상은 없었을 것이다.

▲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파리의 연구실에서/사진=위키백과 캡쳐
▲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파리의 연구실에서/사진=위키백과 캡쳐

마리에 대한 남편의 애정은 남달랐다. 피에르는 마리가 연구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힘을 써줬다. 자신의 연구실을 쓸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실험실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둘은 인생의 동반자이면서 과학적 동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1906년 4월 19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험실로 향하던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마리는 비탄에 빠져 미래를 바라볼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나 다시 연구실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없더라도 연구는 계속해야만 한다”라는 생전의 남편이 강조했던 말 때문이었다.

마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연구였고, 실험실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폴 랑주뱅이라는 남편의 제자와 사랑에 빠지게 됐지만, ‘금단의 사랑’이었다. 폴 랑주뱅은 이미 부인이 있는 남자였다. 이들의 불륜은 마리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을 앞두고 온 매스컴을 통해 뿌려졌고,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게 됐다.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의 냉대는 깊어졌고, 노벨상 선출 기관 또한 수상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노벨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마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스웨덴으로 날아가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여성에게 냉혹했던 시대에 마리는 과학자로써 스스로 빛났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 ‘리틀 퀴리’로 수많은 부상병을 치료했다. 자동차에는 X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치가 설치돼 있었고, 이것으로 병사들을 신속하게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훗날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34년 7월 4일 ‘오늘’ 방사능으로 인한 백혈병으로 마리 퀴리는 사랑했던 남편 피에르 퀴리 곁으로 떠났다. ‘퀴리 부인’으로./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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