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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0월23일:박기서의 정의봉, 안두희를 심판하다

김은주 기자

김은주 기자

  • 승인 2016-10-22 20:00
▲ 안두희/사진=연합db
▲ 안두희/사진=연합db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께 인천 한 아파트에서 팔순 노인이 머리가 깨지도록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뒀다. 노인을 가격한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는 글귀가 새겨있었다. 그 정의봉에 맞아 죽은 이는 ‘안두희’였고, 정의의 이름으로 방망이를 내리친 이는 ‘박기서’였다.

안두희는 잘 아는 봐와 같이 1948년 민족의 지도자였던 백범 김구를 암살한 인물이었다. 암살범임에도 처벌은커녕 형이 감형되고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다시 복귀해 승승장구했으며, 이후 군납업자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이였다.

그러다 1960년 4.19혁명 후 ‘김구 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안두희의 신변에도 크고 작은 위협이 생겼다. 1961년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지만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고 1965년 당시, 지금은 작고한 백범독서회장 곽태영이 휘두른 칼에 목이 찔렸다가 구사일생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1987년에는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2007년 작고)에게 붙잡혀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 1996년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내려친 박기서 모습/사진=연합db
▲ 1996년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내려친 박기서 모습/사진=연합db

백범 김구의 암살범이라는 낙인이 박힌 안두희의 삶도 호됐다. 도처에 자신을 노리는 눈을 피해 안두희는 신분을 숨긴 채 쥐 죽은 듯 숨어살아야 했다. 그러나 오랜 도망자 신세로 목숨을 연명하던 그도 역사의 심판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안두희에게 정의봉을 내려친 박기서는 당시 47세의 버스기사였다. 그는 ‘김구 암살범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라는 이유로 살해 동기를 밝혔다. 사람을 죽인 범죄자가 아닌 민족의 원흉을 처단했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됐다. 언론에 보도되자 박기서를 옹호하는 여론이 들끓었으며 무료 변론해주겠다는 변호사가 줄을 서기도 했다.

박기서의 범행에 얼마나 호의적이었는가는 당시 그가 범행에 사용했던 정의봉을 증거물로 압수했다가 재판 후 돌려줘 박기서가 보관하게 했다는 점이 말해주기도 했다. 이후 박기서는 구속, 기소돼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선고, 2심에서 5년 구형에 3년 선고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다 19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다.

그의 범행은 당시 호의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법치 국가에서 엄연한 범법 행위라는 비판도 있었다. 한 개인이 역사의 단죄라는 명목하에 살인을 저지른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명백히 밝혀져야 할 문제가 묻히는 일을 볼 때면 박기서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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