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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식 문화칼럼] 대통령의 광화문, 국민의 광화문

최충식 논설실장

최충식 논설실장

  • 승인 2017-02-01 11:40

신문게재 2017-02-02 22면

반려견과 반려묘가 설 연휴 끝나고 동물병원을 찾았다. 개나 고양이도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이렇게 할 건 다하지만 '개 문화'라고는 안 한다. '반려견 문화'라고 한다면 개 아닌 인간이 보이는 사유나 행동양식일 것이다.

문화는 뜻이 많다. 다의적 애매성이라고 쓴 적 있지만 시위문화나 집회문화라는 하위문화도 있다. 광화문 촛불집회는 그대로 문화였다. 조선의 정문(광화문)과 주작대로(세종로)에서 권력의 비정상에 분노한 민심이 켜든 광화문 촛불 1000만개는 역사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사료로도 관리된다. 세계가 극찬한 대상은 자유로운 네트워커들의 촛불집회(캔들라이트 랠리)였지 억지 섞인 맞불집회(카운터 프로테스트)가 아니었다. 정규재 TV에서 “촛불시위 두 배도 넘는 정도로 열성” 운운한 대통령의 인식이 안쓰럽다.

▲ 최충식 논설실장
▲ 최충식 논설실장
그것은 반문화였고 비문화였다. 컬처(문화)의 어원이 '경작, 재배'지만 씨앗을 추려 나무 틈새에 넣고 오줌 누는 '농사짓는 개미'를 문화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강물 건널 때 맨 몸을 던져 악어 밥이 되는 '누' 우두머리의 희생을 문화로 쳐주지 않는다. 종달새의 멋진 노래와 백로의 짝짓기 댄스를 문화로 부르지 않는다. 인간이 개입했다는 이유로 물론 죄다 문화는 아니다. “거짓말이라는 거대한 산”은 문화라는 행동체계나 신념을 포기한 듯한 대통령 자신이 쌓았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토크빌)는 말은 국민에겐 모독이고 치욕이다.

권력의 나르시시즘에 취해 권력을 공적 활용이 아닌 사적으로 남용한 대통령 때문에 망가진 국민적 자존심을 치유해준 것은 광화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럼처럼 우리 광장도 권력층의 공간이 아니었다. 시에나 캄포광장, 베니스 산마르코광장,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이 만난 로마 스페인광장보다 더 멋지고 더 장엄할 수 있었다.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의 광화(光化)는 임금이 덕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것인데 거꾸로 국민이 대통령을 가르쳤다.

경복궁 광화문만이 아니다.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이 그렇고, 덕수궁 대한문도 원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 문 앞과 거리에서 광장의 과도한 요구로 정치제도가 무너지는 '집정관 정치' 현상은 없었다. 집단본위적 편향 없이 질서정연하게 비정상을 바로잡았다. 그리스 아고라(agora), 독일권의 플라츠(platz), 프랑스권의 플라스(place), 영어권의 스퀘어(square)나 플라자(plaza)에 당당히 맞설 광장을 보았다.

그런 어마어마한 문이 따로 없는 동성로나 금남로건 타임월드 앞이건 상관은 없었다. 반갑게도 광장이 보수와 진보의 이항대립을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군중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새로운 정신의 집합적 군체였다.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 한 단어로 이 단어가 나오기 전과 후를 둘로 나눴다. 정상과학→위기→혁명→새로운 정상화라는 흐름으로 과학적 귀납법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광화문 광장 역시 촛불 이전과 이후를 양분하고 있다.

광장의 그 촛불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일부의 시각과 달리 변질되지 않았다. 다만 더 왜곡되기 전에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옮겨갈 시점이다. 유리 로트만은 문화, 반문화, 비문화를 각각 현자, 바보, 광인으로 비유한다. 우리가 바보나 광인일 수 없다. 탄핵심판 심리 중에도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대통령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역적 이완용도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항변했었다. 다시 정의한다. 문화는 인간에게 나타난다. 개, 고양이, 누, 백로나 종달새가 갖지 못한 가치의 소산이 사람의 문화다. 대통령 문화가 아쉽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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