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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만필] 다시 시작

오진혜 세종국제고 교사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19-12-19 10:59

신문게재 2019-12-20 22면

오진혜
세종 국제고 오진혜 교사
소원이 깊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먼 길, 먼 시간을 돌고 돌아 왔지만 결국 그토록 원하던 교단의 자리에 이렇게 서 있다. 막상 교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지금껏 지나온 학창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그저 병아리처럼 올망졸망한 우리를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마음으로 보살펴주시던 담임 선생님. 모래장난을 하고 오면 때 묻은 고사리 손등을 부드럽게 씻겨주고 '손이 깨끗해야 아야 하지 않아~'라며 제 자식처럼 사랑을 담뿍 담아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학교 3학년 때, 언제나처럼 유유자적 정신 못 차리던 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적이 나오는 건 정말 부모님께 감사해야겠다며 노력하지 않는 나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날리셨던 담임 선생님, 그리고 많은 책을 빌려 주시며 가끔 소감을 묻고 대화를 나누던 수학 선생님, 너무 너무 좋아해서 매일같이 음료수를 사다 드리고, 미소 한번에, 손짓 한 번에 설렜던 멋진 영어 선생님...



수많은 선생님들의 보살핌과 지도가 지금의 나를 완성시켰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함이 엄습했다.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과연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교사로 치면 난 이제 겨우 햇병아리고, 아슬아슬하게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 같은데 내가 과연 지금까지 나의 자양분이 되어 주셨던 그 분들처럼 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교직 생활을 시작하는 3월의 눈부신 어느 날, 그렇게 너는 나에게 왔다. 유난히 가녀린 선으로 눈빛을 반짝거리며 가만히 다가와 일본어가 재밌고 좋다며 수줍게 고백하던 너...수업 중 졸릴 때면 천근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안간 힘을 쓰고,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찾아와 여행 갔던 얘기나 일본어 공부하다가 궁금한 부분, 그리고 소소한 일상을 재잘거리던 아이...

처음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대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렇게 조금씩 먼저 다가와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학생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덕분에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러던 네가 하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었지...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지만 침착한척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매일매일 반복해야 하는 발레가 너무 힘들고, 한창 먹고 싶은 거 많을 때인데 엄격한 식단 조절도 너무 스트레스 받고, 발레를 그만두고 싶은 너와 계속하길 원하시는 부모님 사이에서의 갈등도 힘들어, 일본으로 대학을 가고 싶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너의 모습에 맘이 아팠다.

순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하는 충고나 조언이 이 학생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조심스러웠다. 더욱이 난 상담 경험도 없고, 이제 겨우 교직 생활 시작한 햇병아리 교사인데...

그저 진심으로 공감하며,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울다가 조금씩 흐느낌에 잦아든 너에게, 너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뭔지, 그냥 현실의 고단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치기어린 맘으로, 순간적인 울컥함으로 누군가에게 어리광 부리고, 기대고 싶은 건 아닌지 가만히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래도 너의 맘이 확고하다면 먼저 부모님과 잘 말씀해 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일본 대학 진학에 대해서는 내가 최대한 알아보고 알려 주겠다고...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통감했다. 그리고 상담 쪽으로도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필요성도 느꼈다.

퇴계 이황은 군자란 우거진 숲속에 있는 난초가 온종일 향기를 피우지만, 스스로 그 향기로움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나 또한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제자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감화력을 키우고 싶다. 비단 학문적 지식뿐만이 아닌 정서적, 인성적으로도 은은하게 피어나는 난초의 향기처럼, 누군가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뿌리 깊은 나무 같은 교사가 되길 희망하며, 오늘도 마부작침의 마음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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