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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의 재미있는 고사성어] 제190강 할고봉군(割股奉君)

장상현/인문학 교수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4-04-02 11:13
  • 수정 2024-04-02 11:15
제195강: 割股奉君(할고봉군) : 허벅지살을 베어 (국을 끓여)군주(君主)를 모시다.

글 자 : 割(나눌 할) 股(넓적다리 고) 奉(받들 봉) 君(임군 군)

출 처 : 춘주좌씨전(春秋左氏傳), 열국지(列國志)



비 유 : 끈기, 충성, 효성, 청렴한 사람을 비유. 한식(寒食/찬밥을 먹는 날)의 유래

올해는 4월 5일(금요일)이 한식(寒食)날이다. 모두들 조상께 성묘(省墓)의 예(禮)를 올리고 산소의 관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조상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사초[莎草/ 땅고르기, 잡초제거, 봉분 만들기, 잔디식재 및 보식, 주위정리]로 무덤을 정리 한다.

한식(寒食)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매년 청명(淸明)날이거나 그 다음 날로 지정된다.

한식은 예로부터 설날,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우리의 전통 4대 명절이다. 계절적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로 조상의 묘소(墓所)을 보수(補修)하는 적합한 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찬 음식을 먹는 한식(寒食)의 풍습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개자추(介子推)〉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중국 춘추시대에 진헌공(晉獻公)에게는 본처(本妻)의 아들 세 명과 첩(妾)의 아들 두 명이 있었다. 헌공은 첩[驪姬/여희]을 총애했고, 여희는 헌공이 죽으면 자기와 아들 두 명의 운명을 걱정하여 헌공에게 모함하여 이미 태자로 임명되어 있는 본처의 맏아들 신생(申生)을 자살케 하고, 둘째 아들 중이(重耳)와 셋째 아들 이오(夷吾)를 제거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두 명의 공자는 가까스로 진(晉)나라를 탈출하여 망명객(亡命客)의 신세가 되었다.

특히 둘째 공자 중이는 인품도 훌륭하고 끈기와 용맹을 겸비한 청년으로 대부분 타국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다 작은 나라인 위(衛)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위나라는 쫓겨 다니는 중이(重耳)를 환영하면 혹 진(晉)나라의 분노를 살 것 같아 박대하며 쫓아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망명의 무리들 중에 두수(頭須)라는 재물담당자가 일행의 돈과 패물 등을 챙겨 도망하는 바람에 그 일행들은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이(重耳)도 지쳤고, 그를 따르는 10여 명의 수행자들도 지쳤는데 중이가 느닷없이 혼잣말로 "아! 고깃국 한번 먹어보았으면"고 하니까 모든 수행원들이 중이를 원망스럽게 생각하고는 고기국은커녕 밥이라도 한번 실컷 먹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때 일행 중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가 슬쩍 무리에서 나와 없어졌다. 조금 있다가 그가 나타났는데 어디서 났는지 따끈한 고깃국 한 그릇을 들고 와서 중이에게 바친다. 중이가 깜짝 놀라 고깃국을 먹으면서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으니 개자추가 돌아서면서 작은 소리로 "공(公)을 위해 저의 허벅지 살을 떼어 그 살로 국을 끓였습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중이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많은 것을 느끼고 다시는 밥 타령을 포함한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고 오직 고국으로 돌아가 진(晉)나라의 군주(君主)가 될 것을 가슴속 깊이 맹세하였다.

한편 진(晉)나라는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여희(驪姬)와 그의 아들들이 살해되고 나라 사정이 정상화 되면서 망명하고 있는 중이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귀국한 중이는 진나라 군주가 되어 문공(文公)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망명생활(19년)했던 쓰라린 교훈을 생각하며 나라를 잘 다스려 춘추오패(春秋五覇)중 두 번째로 패권국(覇權國)이 되었다.

진(晉)나라 군주가 된 문공(文公/중이)은 나라의 질서를 정상화시킨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는데 망명(亡命)생활을 함께한 신하들은 거의 1~2등 공신(功臣)에 임명하였는데 어쩌다 잘못하여 개자추(介子推)를 공신명단에서 빠뜨렸다. 이때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공신명단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면산(綿山)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어머니께 효도하며 살았다.

한편 이 사실을 늦게 알게 된 문공(文公)은 부랴부랴 개자추를 찾게 되었고, 면산(綿山)까지 직접 가서 찾았으나 개자추가 산에서 나오지 않자 신하 중 한 명이 "개자추는 효성이 지극하여 산에 불을 지르면 어머니를 모시고 나올 것"이라고 보고하자 문공은 면산(?山)에 불을 질렀고, 산이 다 탔으나 개자추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문공이 군사를 풀어 수색해보니 큰 버드나무를 껴안고 새카맣게 탄 두 구의 시신(屍身)이 발견되었다. 두말 할 것 없이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였다.

그 일을 직접 목격한 문공은 이에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날부터 한 달 동안 불을 쓰지 않도록 조치하고 불이 없는 동안 모든 음식은 차게 먹도록 하여 개자추에 대한 미안함을 기리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찬 음식 먹는 기간을 한 달을 사흘로 사흘을 하루로 줄여 개자추를 기리고 있다.

사람의 삶의 가치(價値)는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으나 필자는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가장 으뜸가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는 하찮은 동물도 자기가 받은 은혜에 보답을 하는 판인데 사람이 되어서는 오죽하겠는가?

특히 조상의 은혜에 대한 보답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다고 볼 수 없다.

전통 있는 명문가(名門家)일 수록 또는, 훌륭한 인격과 인성을 갖춘 엘리트일 수록 조상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조상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고, 조상의 기반 아래 내가 자라고 배우고 현재 위치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조상의 은혜를 벗어난 삶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은혜를 베풀었거든 보답을 구하지 말고, 남에게 주었거든 후회를 하지 말라(施恩勿求報 與人勿追悔/시은물구보 여인물추회)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말 인간다운 교훈이 아니겠는가! 보답을 바라고 베푸는 은혜는 사기(詐欺)에 버금간다. 이른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훌륭한 별칭(別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충(忠), 효(孝), 예(禮)라는 가장 소중한 자산(資産)을 가지고 있다.

한식의 유래를 다시 한 번 떠 올리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참다운 정신이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장상현/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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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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