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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하지감자

양동길/시인, 수필가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4-06-28 00:00
의학 관련 강의를 듣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저녁시간이라 전화 올 일이 없을 것 같아 무음으로 바꿔놓지 않은 탓이다. 부리나케 강의실 밖으로 나와 받으니, 1층으로 간식 먹으러 내려오라는 전화였다.

1층 강당에서는 합창단이 연습 중이다. 왁자지껄한 로비로 내려와 보니 원탁마다 마늘빵과 찐 감자, 음료가 준비되어 있다. 단원들과 정겹게 인사 나누고 빈자리에 앉았다. 굴풋하던 차여서 모두가 꿀맛이다.

감자는 가난의 상징 아니던가? 먹을 것이 부족하던 어려운 시절이 연상된다. 춘궁기엔 간식이라기보다 주식에 가까웠다. 산간지방에서는 주식으로 먹기도 한다들었다. 허기 달래기엔 최고여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황작물이었다. 주로 쪄서 먹었지만, 감자밥 · 감자범벅 · 감자부침개 · 감자 샐러드 · 감자수제비 · 감자조림 등 다양하게 조리해 먹는다. 녹말 · 당면 · 엿 · 주정 · 통조림 등 각종 가공식품으로 만들어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 무렵 수확하기 때문에 하지감자라고도 불렀는데, 마령서(馬鈴薯), 북감저(北甘藷), 지슬이라고도 한다. '마령서(馬鈴薯)'는 감자를 뽑아 올렸을 때 말목에 매다는 방울이 모여 있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감저(甘藷)'란 말은 본래 사탕수수와 고구마를 이르는 말이었다. 60년 먼저 들어온 고구마가 있어, 혼동을 피하고자 '북방에서 온 감저'라는 의미로 '북감저(北甘藷)'라 불렀다 한다.?우리 동네에서는 방언인 '북감자'라 부르기도 했던 기억이다. 경로가 기준이 되어 북쪽에서 전래된 감자는 '북저(北藷)', 일본 통하여 남쪽에서 전래된 고구마는 '남저(南藷)'라 하기도 한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기슭이란 뜻이다. 척박한 환경과 가뭄, 어디에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리라.

하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북반구의 일 년 중 낮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당연히 밤 길이는 가장 짧다. 보리와 밀을 수확하여 타작하고, 감자, 마늘, 대마 등은 거두어 갈무리하였다. 병충해 방재 등 기존 작물의 관리는 물론, 수확과 아울러 새로운 작물도 파종해야 했다. 누에도 치고, 장마 대비 비설거지 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일거리가 무척 많은 시기다. 분주했던 농촌 일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미술 하는 한 친구가 계족산 자락에 있는 1000여 평 땅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농사짓는 재미에 푹 빠져, 아주 열심이다. 일하는 현장에 수차례 가본 적이 있다. 텃밭이라 하기에는 넓고, 전문 농장으론 규모가 작아 애매한 크기다. 그러거니 일상생활에 필요한 채소며 과일을 골고루 심었다. 상품으로 팔기에는 규모가 작아, 수확한 농산물을 지인들과 나누었단다. 친환경농법으로 직접 땀 흘려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선한 것이기에 자랑스럽고 즐거웠다. 받는 사람 역시 무척 반겨주었다. 그런데 처음만 그랬을 뿐, 반복되자 점차 귀찮아하는 기미가 보이더란다. 아무래도 보기에 지저분하고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체험학습장이었다. 가꾸는 것은 직접하고, 수확은 유치부, 초등부 아이들이 하게 하는 것이다. 살충제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곤충, 벌레, 지렁이 등과 만날 수 있다. 흙 놀이는 물론, 일하는 즐거움, 수확의 기쁨을 만끽한다. 작은 힘으로 쉽게 캘 수 있도록 땅을 먼저 들춰놓는다. 아이가 플라스틱 모종삽으로 아래쪽 흙을 조금 파헤치고 들어 올리면, 여러 알의 열매가 주렁주렁 따라 나온다.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진다. 자신이 채취한 농산물은 각자 가져가게 한다. 부족한 것은 일정 양이 되도록 추가하여 채워 보낸다. 아이들이 6월엔 감자, 9월 말경 고구마 캐는 모습을 보았다. 먹거리의 생산 과정이 절로 이해되며 자연친화적이어서 좋은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감자는 변함이 없지만, 농사짓는 목적, 역할이나 용도, 인식이 매우 다르다. 어디 감자뿐이랴, 세상일이 다 그렇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최종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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