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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가방 크기 밑돌 위에 성돌 쌓아 5m 높이
몽고군부터 왜구의 침략때 양민 대피용도
지표·문헌조사 마치고도 문화재 지정 '모르쇠'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5-04-01 17:33

신문게재 2025-04-0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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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계룡산성이 시간이 흘러 무너지고 낙엽이 쌓여 옛 모습을 추정하기도 어려워졌다. 국가적 규모의 토목공사에 많은 양민들이 돌을 날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임병안 기자
계룡산성이 국내 여러 산성중 가장 높은 곳에 큰 규모로 축성된 700년 역사의 문화유산임에도 충남도 지정문화재 등재 절차는 5년째 보류상태다. 신원사 방향 계룡산 중턱부터 쌀개봉 정상(해발 830m)까지 둘레 4.8㎞ 규모의 성벽이 남아 있고, 기초조사와 문헌조사까지 마쳐 고려인들이 오갔을 대피로까지 찾아놓고 '보완서류 미비'를 들어 빗장을 거두지 않고 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로 눈발까지 날린 3월 29일 중도일보는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 방면의 계룡산을 찾아 6시간 가량의 계룡산성 탐방을 벌였다. 등반한 지 1시간쯤 흘러 등산로가 계곡과 만나는 지점에서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돌담을 만나면서 계룡산성은 시작된다. 가장 아래에 여행용 가방 만한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로는 30~50㎝ 정도 성돌을 불규칙적으로 쌓아 사이사이 빈틈에 작은 쇄기돌을 박아넣었다. 고려시대 이후 성벽의 일반적 축조방식이다. 성인 혼자 들기에 버겁게 보이는 화강암을 층층이 쌓아 5m 이상의 높이는 되어 보였고, 계룡산의 급경사를 따라 성벽도 가파르게 치고 뻗어간다. 이곳부터 연천봉과 문필봉 그리고 관음봉에 쌀개봉까지 돌을 하나씩 쌓아 성곽을 둘렀고, 성내 면적은 60만㎡에 이른다. 이곳 등산로에서는 기와 부서진 조각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등산객들이 흔히 쌓은 돌탑처럼 이곳에서는 깨진 기와편을 탑처럼 쌓아 올린 것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1231년부터 1270년까지 몽고군의 6차례 침략부터 1290년 합단(카단) 침입과 격퇴 그리고 1380년 7월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고려인들이 계룡산성 안으로 대피했을 때 주거지와 창고 등에 쓰이던 기와가 시간이 흘려 부서진 조각으로 추정된다. 또 산성도 상당수 무너지고 그 위에 자연 할석이 다시 쌓이면서 원형을 추적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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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신원사 방향 중턱에 남은 산성의 온전한 모습. 화강암을 층층이 쌓아 5m 이상의 높이에 총 연장 4.8㎞에 이른다.  /사진=임병안 기자
계룡산국립공원사무소는 자체 예산을 들여 2017년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공주시는 2021년 계룡산성의 기와파편의 해석과 문헌조사 용역까지 마쳤다. 계룡산성을 충남도 지정 문화재로 등재 하기 위한 절차였으나, 2021년 이후 현재까지 보류 상태다. 공주시는 보완 서류가 제출되지 않다는 것을 보류 사유로 설명하고 있으나, 지역사학계에서는 앞서 문헌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보완은 충분히 이뤄졌고 오히려 충남도문화재위원회를 개최해 심의를 재요청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까지 성벽에 대한 간단한 지표조사만 이뤄졌을 뿐 성 내·외부에 미확인 시설을 조사하고 신원사와 동학사, 갑사 그리고 인근 마을까지 포함한 광역적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박순발 충남대 고고학과 명예교수는 "규모가 상당히 큰 산성이면서 거란과 몽고의 침입 때 양민들이 계룡산으로 대피하던 용도로 성벽뿐만 아니라 성 안에 건물지 등 조사할 게 많다"라며 "문화재 가치는 이미 충분히 규명되어 행정적 보전 조치가 필요한 때"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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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성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아 옛 기와 파편이 등산로에 흩어져 등산객들이 탑쌓기 용도로 쓰이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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