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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열대의 관능과 망고시루의 첫 맛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25-07-16 17:45

신문게재 2025-07-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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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난순 기자
오전 11시가 가까워질 무렵, 편집국에 손님이 들어왔다. 손님의 손엔 성심당 케이크 가방이 들려 있었다. 대전 은행동에서 사람들 양 손에 바리바리 들려 물결을 이루는 그 초록색 가방 아닌가. 손님이 가고 나자 사무실 가운데 넓은 탁자에 케이크가 펼쳐졌다. 맙소사, 성심당 망고시루였다. 생각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영롱한 자태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케이크는 신라 선덕여왕의 왕관처럼 찬란했다. 나는 플라스틱 수저를 들고 만반의 준비를 다졌다. 드디어 수많은 젓가락들이 달려들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자 씹을 새도 없이 사르르 녹았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와, 정말 맛있다, 진짜 맛있어. 후배가 그러는 나를 보고 깔깔 웃었다. 먹는 데에는 인정사정없는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입술에 바른 빨간 립스틱이 수저에 묻어났지만 개의치 않고 한번이라도 더 먹기 위해 혈안이 됐다. 언제 먹어보나 했는데.

10여년 전, 프랜차이즈 빙수 전문 카페에서 출시한 제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눈꽃처럼 새하얀 빙수 위에 인절미 등 기존의 빙수 재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먹어본 사람마다 칭찬 일색이었다. 회사 후배에게 물어봤다. 정말 맛있냐고. 후배 역시 "환상적이에요"라는 말로 내 의심의 눈초리를 단박에 제압했다. 나는 내 뇌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동원해 그 맛을 상상했다. 어느날 지인과 그 빙수를 먹게 됐다. 불철주야 갈고닦은 내 상상력은 보기좋게 1라운드에서 KO패 당했다. 큰 기대만큼 실망도 컸다. 비주얼은 세련된 느낌이었으나 내 혀는 가차없이 냉혹했다. 그 빙수는 그날 먹은 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망고시루는 기대 이상이었다.



어렸을 때 본 '말괄량이 삐삐'는 당시 아이들에게 최고의 드라마였다. 빨간 머리를 양 갈래로 따서 머리 양쪽으로 뻗치게 하고 깻묵 먹다 재채기한 것처럼 얼굴에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말괄량이 삐삐. 항상 긴 스타킹을 신고 가족은 꼬마 원숭이와 말이 전부인 삐삐의 기상천외한 모험은 우리를 티비 앞에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삐삐가 케이크를 만들었다. 둥근 빵 위에 나이프로 하얀 생크림을 덕지덕지 어설프게 바르고 나서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는데. 나는 얼굴 여기저기 생크림을 묻히고 손가락도 쪽쪽 빨아먹으면서 케이크를 볼이 미어터지게 먹는 삐삐를 보면서 침만 삼켰다. 도대체 케이크는 얼마나 맛있는 걸까. 궁금하고 먹고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언제쯤 먹어 볼 수 있을까.

회사에서 망고시루 먹은 다음날 나는 흥분해서 언니에게 톡을 보냈다. 망고시루 진짜 맛있어. 언니 왈 "멀리 있는 사람들도 대전까지 와서 사 갖고 가는데 우리도 한번 먹어보자." 그 주말에 우리는 성심당 분점에서 망고시루를 사서 청양으로 달렸다. 석갈비로 저녁을 거하게 먹고 망고시루 박스를 열었다. 또 봐도 신기했다. 엄마가 해주던 영락없는 떡시루 모양이다. 이번엔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생크림이 남달랐다. 봄에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산 케이크의 생크림은 느끼하고 미끌거려 언니한테 지청구 먹었는데. 망고시루 생크림은 봄날 따사로운 햇볕에 말린 이불처럼 톱톱하고 혀에 닿는 느낌이 상큼했다. 다 같은 생크림인 줄 알았는데. 망고는 양푼으로 들이부은 것처럼 양이 어마어마하다. 망고의 무게에 케이크가 옆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눈부신 생크림과 망고의 조화. 마르그리트 뒤라스 원작의 영화 '연인'이 떠올랐다. 끈적끈적한 열대의 나른함 속에서 중국인 갑부와 격정적인 관능에 빠져드는 소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국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쇼팽의 왈츠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소녀는 오열한다. 잠 못 이루는 열대의 욕망과 달콤한 망고의 향. 망고시루. <우난순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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