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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정 회고록]남기고 싶은 이야기(3)스마트한 손수익 전 충남도지사

시장.군수, 월 1회 평일에 의무적 휴가
읍면동장 연고지에 배치
공문서 생산 전년 대비 무조건 50% 감축
김용교 전 아산시 부시장(전 충남도정책기획관)

한성일 기자

한성일 기자

  • 승인 2026-01-20 13:37

신문게재 2026-01-21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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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시장 군수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손수익 전 충남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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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교 전 아산시 부시장(전 충남도 정책기획관
김용교 전 아산시 부시장(전 충남도정책기획관)의 충남도정 회고록 남기고 싶은 이야기 3편은 지난주에 이어 손수익 전 충남도지사에 관한 회고록이다.



(7) 시장·군수, 월 1회 평일에 의무적 휴가를 실시하다



1970년대 말에도 우리나라는 식량증산,새마을 운동, 수출 진흥, 국가안보 등 국가 전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여 나갔다.

유신체제로 국론분열이 있었지만 국정 기조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시장 ·군수는 국방 외교를 제외한 국정 과제를 최일선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토요일 휴무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때로는 새벽에 집을 나와 밤 늦게까지 움직였다.

먼저, 겨울에는 식량 증산을 위한 객토(논에 외지 황토 흙을 가져다 붓는 것)와 심경(논을 깊이 갈아엎는 것) 독려, 봄에는 통일벼 종자 못자리 독려, 여름에는 벼 병해충 방제, 퇴비증신 독려, 가을에는 추곡 수매 독려 등 농민들과의 접촉을 넓혀가는 일이 쉴 틈 없이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의 주재, 방문자 접견, 애경사 참석, 보고 청취, 결재 등 일요일도 출근하며 5분, 10분을 쪼개 쓰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시장 군수와 읍 · 면 ·동장들이었다.



게다가 주민들과 동화되고 어울리다 보면 약주, 농주도 마시게 되어 밤늦게 귀가하면서 심신이 녹초가 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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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익 전 충남도지사
이 같은 사정을 잘 아는 손수익 지사는 시장 군수들에게 한 달에 하루씩 평일 날 의무적으로 휴가를 가도록 지시하였다.

휴가 날은 시장 군수 관사가 되었건 절이나 성당, 교회가 되었건 또 그 어느 한적한 곳을 찾아 술도 마시지 말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휴식도 취하며 재충전도 시키고 복잡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가라앉히며, 맑혀나가자는 것이다. 멈춤이 없이 앞만 보고 갈 때 두서없이 나가게 되고 한 달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계획적이긴 커녕 미시적 하루하루를 때워나가기 쉽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고,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어디서 보람이 있었는가를 회상해보자는 것이다.

가깝게는 다음 달의 시·군정 방향을 다듬어 보라면서, 육체적으로 건강을 챙기고 정신적으로 건전한 시간을 짧게나마 가져보라는 시장·군수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이를 의무화시켰기 때문에 시장· 군수는 도지사에게 휴가신청을 하였고, 도지사는 승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우리는 때로 쉼표가 필요하다. 쉼표란 STOP과 다르다. 멈추어 뒤돌아보고, 마음을 챙겨 앞을 내다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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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에 소재한 윤봉길 의사 기념관
(8) 읍면동장을 연고지에 배치하다

읍 ·면 ·동장의 임명과 자리를 옮기는 권한은 시장·군수의 권한이다. 시장 군수의 인사권은 도지사가 갖고 있고 읍 · 면 ·동장의 인사권은 시장, 군수가 가지고 있는 구조다.

중앙에서 지침이 내려오면 도지사는 시장 ·군수에게 지시하고 시장 군수는 읍 ·면 ·동장에게 지시한다. 그 당시는 식량 증산과 하곡, 추곡 수매 독려, 새마을사업, 치산녹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 제한의 가족계획도 주요 행정 과제였다.

이 같은 과제가 성과를 거두려면 주민들, 농민들이 행정의 권장 사항을 따라주고 응해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볍씨 선택의 예를 들어보자. 정부는 그 당시 부족한 식량난 해결을 위해 추청벼(일본 도입 품종으로 아끼바레 쌀)와 같은 밥맛 좋은 일반벼보다 밥맛은 떨어지지만 3배 이상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 볍씨로 못자리를 권장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밥맛도 차이가 있고 일반벼보다 쌀값도 싼 통일벼를 꺼려 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방침은 확고하여 때로는 반 강제성도 띠면서 독려해야만 했다. 농민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마라"고 하지만 그 당시 국가적 상황을 놓고 볼 때, 행정의 민주성이나 자율성에 맡겨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안면행정(顔面行政)이라는 말이 대두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 때 소통은 잘 될 수밖에 없고 행정의 권장 시책 달성에도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손 지사는 읍민, 면민, 동민들과 행정의 최일선 현장에서 대면 접촉하는 읍·면 ·동장을 연고지에 배치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시장 군수에게 지시하였다. 연고지라 함은 태어나고 자란 읍·면·동 즉, 고향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읍 ·면 ·동장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배치할 경우, 어르신들은 아버지·어머니 친구들과 가까운 사이일 수 있고 읍 ·면 ·동장 또래는 초·중·고 동창들인 경우도 많다. 손 아래뻘은 고향 학교 후배거나 자식과 동년배들로 노·장·청 누구나 어색하지 않게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예컨데, "어르신! 저의 면(面)이 현재 추곡 수매 실적이 꼴찌입니다. 어려우셔도 제 체면을 봐서라도 도와주십시오","친구! 퇴비증산 실적을 도청에서 조사해 갔는데 우리 면(面) 성적이 가장 안 좋다네. 이달 말 최종 심사에는 만회할 계획이니 힘들어도 땀 좀 흘려줘야겠네", "아무개야 논에 객토 좀 해 줘야겠어. 우리 면이 제일 게으르다고 소문이 났어. 날씨도 춥지만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힘 좀 써봐" 등등 이렇게 읍소하다 보면 귀찮아도, 힘들어도, 손해를 보더라도 면장 체면을 보아서 기꺼이 협조해 주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연고지 배치는 행정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고 실제 성과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고지 읍 ·면 ·동장은 처신함에 있어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개 면장이 OO 아들이여, 사람 점잖고 괜찮다"면서 힘을 실어 주기도 하였다. 서로 아끼고 위해 주는 입장에서 읍·면 ·동 행정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 지사의 고단수 지혜와 리더십을 발휘한 인사 운영의 묘책이었다. 이처럼 읍면동장 연고지 배치는 연고지에 배치받기를 꺼려 하는 일부 읍면동장도 있었지만 그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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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수해 현장을 안내하는 손수익 전 충남도지사
(9) 공문서 생산을 전년 대비 무조건 50% 감축하다

행정행위에는 늘 공문서가 등장한다. 1970년대 후반에도 우리나라는 식량 증산과 새마을운동 등의 국정과제 추진과 성과를 내기 위한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독려와 감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화뿐만 아니라 책임이 따르는 경우 실적보고와 지시사항은 대부분 문서로 이루어졌다.

도청의 한 개 과에서 하루 1건의 문서를 생산하면 40개 과에서 하루 40건을 17개 시 ·군에 발송하게 된다. 시장, 군수 입장에서는 하루에 40개 과제를 지시받은 셈이다. 이를 시·군에서 소화시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는 250개의 읍 ·면·동까지 재차 지시되었다.

시군과 읍면 공무원들의 경우 주민 접촉해야지, 전화 독촉 받아야지, 실적 보고를 위해 현장을 확인하고 이장들과 협의하는 등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주말에도 쉴 사이 없이 동분서주하며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랬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공문서 발송에는 책임 회피성, 면피성의 경우도 허다했고 식량 증산 업적의 경우 계절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이미 지나간 일이 돼버리기가 일쑤였다.

손 지사는 주민을 위하는 일도 아니고, 행정의 실효성도 없는 이 면피용 공문서가 일선에서 뛰고 있는 공무원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을 주고 있음을 간파하고, 보고문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획기적 대책으로 공문서 생산 50% 감축을 지시하였다.

도청에는 공문서 접수와 발송을 전담하고 도지사 직인을 간수 관리하는문서계가 따로 있었는데 여기에는 문서접수대장과 문서발송대장에 연간 일련번호를 부여하게 돼 있어 실과별로 50% 감축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가 있었다.

보고문서로부터의 부담이 줄어든 만큼 여유를 갖게 되면서 대주민 봉사활동에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고, 이 조치가 계기가 되어 손 지사가 충남도를 떠난 후에도 도청 공직자들에게 공문서 한건 한건을 생산할 때마다 신중을 기해 나가는 인식이 이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손 지사는 스피치도 짧았고 대외적으로 나가는 감사패나 담화문의 내용도 간단했다.

직원들에게 도지사 훈시를 할 때도 간단,명료,명쾌하고 짧게 하여 손 지사의 발언 내용을 녹음 풀이하여 문자로 옮기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더 첨가할 말도, 추가 삭제할 말도 없는 명연설이었다.

1979년도에는 대전에서 전국체전 60주년을 맞는 갑년(甲年) 체전이 열렸다. 사전준비도 치밀했고 예산은 적게 들이고, 품격은 높였다.

체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협조, 협찬,합력이 줄을 이었다. 체전을 마친 후 이(그)분들에게 고마운 뜻을 감사패로 전달키로 하고 감사패 제작에 들어갔는데 감사패 문안이 걸작이었다.

감사패 맨 위 부분에 감사패, 옆 아래쪽에 ○○○ 성명을 쓰고(기업일 경우 기업명과 성명 병기) 감사 내용에는 "감사했었습니다" 이 한 줄이 전부였다. 그리고 ‘충청남도지사 손수익 드림’이 전부였다.

손 지사의 행정 스타일은 이처럼 더 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헛되이 헤프게 쓰는 것도 없고, 궁색하게 예산을 편성하지도 않았다. 할 말은 꼭 했고 쓸데없는 말은 삼갔다. 행정을 알았고 인심을 읽었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봉사’하고 ‘증거로 행정’하는 행정의 대가였다.

김용교 전 아산시 부시장(전 충남도 정책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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