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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자치시대를 맞아 국익과 지방이익의조화,집권과 분권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사진=김용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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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용 교 전 충남도정책기회관 전 아산시 부시장 |
배재대 겸임 부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당시 배재대에서는 외국인 유학생 유치가 당면과제였다. 2002년도 무렵 입학 정원은 채울 수 있었지만 장래를 내다볼 때는 안일하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정순훈 총장의 대학 미래 전략이 있었고 우선은 중국 학생을 대상으로 접촉이 이루어졌다.
동료교수 중 한 명이 중국에 출장하여 유치 활동을 벌이는 가운데 대화 파트너인 중국 대학교수에게 "한국에 한 번 다녀가시라"고 가볍게 건넨 말이 한꺼번에 7명이 온다고 하여 대학본부와 상의해보니 숙박료 등 비용이 과다 소요되니 일부 만찬 비용은 협찬도 강구해 보라는 의견이라며 "충남도에서 지원이 가능하겠는지?"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나는 배재대가 충남도 관내에 소재하고 있다면 검토할 명분이 있겠지만 대전시 관내에 소재하고 있다 보니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사님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배재대 강의를 해보니 어떻든가?" 하시며 겸임교수직에 관심을 나타내시며 소감을 여쭈시었다.
"나는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너무나 과분하고 영광스러움과 더불어 보람은 말할 수 없이 크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배재대 동료 교수로부터 중국대학 교수들의 손님맞이 관련 사항에 대해 말을 꺼냈다.
충남도에서 지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고 우리나라 일부 대학들이 중국 학생을 대상으로 유학생 유치 활동을 펴오고 있음에 방점을 두고 말을 꺼낸 것이었다.
승용차가 얼마쯤 지났을까? 어디엔가 전화를 하시더니 "배재대 손님맞이 만찬을 베풀어 주셨으면 한다"는 요지로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다. 통화를 마치신 심 지사께서 "김주일 대전 상공회의소 회장께 부탁을 했는데 그렇게 하시기로 했다"며 "그날 함께 잘 모시도록 하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나 감사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주일 회장과 심대평 지사는 사돈관계였다. 심 지사의 셋째 아들 심우찬 변호사의 아내가 김주일 회장의 딸로 심 지사의 며느리였다. 김 회장은 대전에서 기업체를 경영하시면서 상의회장도 맡고 계시던 때였다.
만찬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성대히 이루어졌고 김 회장은 말수가 거의 없으셨다. 나서지 않으셨고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도록 신경을 썼다. 덕인(德人)이었다. 만찬을 마친 후 한국의 노래방 문화도 체험할 필요가 있다며 2차 자리도 마련해 주셨는데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람을 도울 때는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는 것이 진정으로 도와주는 것"임을 깨달은 바 있어 심 지사의 부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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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실을 도청으로 옮겨 자치현장에서 강의하기도 하였다. 사진=김용교 제공 |
부모님께서 작고하셨을 때는 불효(不孝)의 자책감과 죄책감 때문에, 이에 압도되어 큰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 슬픔이 어찌 눈물 없이 지나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감격의 눈물은 내가 사무관에 승진하였을 때였다. 9급 공채로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1969년 9월 1일 심춘택 부여군수로부터 지방행정 서기보 시보로 첫 사령장을 받고 군청 앞마당에서 군청사를 바라보며 "나도 사무관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일이 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오랜 기간 근속한다면 사무관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다짐은 아니고 막연한 기대와 동경을 품은 기억이 있다. 당시 부여군에는 다섯 명의 과장이 있었는데 내무과장, 재무과장, 농림과장이 사무관이었고 식산과장과 건설과장은 각각 지방행정 주사, 지방토목 주사 등 6급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21년만인 1991년 2월 사무관에 임용되었다. 나는 사무관이 된 후 가장 먼저 손을 쓴 것이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부모님 묘소는 부여군 내산면에, 조부모 묘소는 부여군 남면에 각각 모셔져 있다 보니 성묘도 부모님 묘소에만 가게 되고 돌보지 않으니 폐분(廢墳)이 되다시피 하여 늘 마음에 걸려 숙제로 남아있었다.
묘소를 정비(莎草)하던 날 형제, 자매, 손주들까지 모여서 떼를 입히고 주변을 손질하며 비석도 세웠다. 사초를 마친 후 묘제(墓祭)를 지내는 중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순간 눈물이 벌컥 쏟아져 내리고 주위에 식구들이 서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울어댔다.
찌든 가난 속에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부터 떠오르면서 시골 면서기로 출발하여 도청 주요부서에서 당당하게 근무하면서 사무관이 되어 보령군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으니 나이 40까지 살아온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었다.
두 번째 큰 울음은 배재대 겸임교수 임명장을 받고서였다. 귀가하여 거실에서 임용장을 펴놓고 자랑 겸 아내에게 보여주는 순간 벌컥 울음이 나온 것이었다. 나는 애시당초 도청같이 큰 집에서 근무하게 되리라는 것은 소망한 바도, 기대한 바도 없었다. 또한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할 꿈도 목표도 없었다.
하물며 대학교수가 되어 후학을 가르치는 강단에 선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겸직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그때 나이 52세였다.
그 당시 울음 속에 순간순간 스쳐 간 단어들은 가난, 출세, 영광,성실, 정직,용기,관계,도전의 역사,선택의 역사,은근과 끈기,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등이 떠오르고 사라지며 기쁨의 감격과 울음이 뒤범벅이 되었었다. 한참 울고나니 가슴이 후련하였다.
그런데 나는 배재대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한가지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4년간 장기 재직하였다는 것이다. 당초 나는 1년 정도 재직하면 되겠지, 하고 1년간 근무할 예정이었다. 1년을 마치고 나니 학과 사무실에서 1년간 연장하여 강의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유인즉 "요즘은 학생들이 교수들 강의를 평가하고 있는데 나의 평가점수가 높게 나와서 재임용 방침을 세웠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수락하고 2년 차 강의를 이어갔다.
그런데 같은 정황으로 3년 차, 4년 차 강의를 학교 측 요청으로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국 내가 눈치 없는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그 당시 충남도청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권희태 과장과 사무관이었던 추욱 계장이 배재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고 지도교수는 정하용 교수였다.
따라서 내가 2년 정도 강의를 하고 권희태 과장 또는 추욱 계장께 물려 주었더라면 남 보기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고 수강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도 교수들의 순환 강의에 따른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독식하는 바람에 다양한 강의 내용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고 권 과장과 추 계장도 대학 강단에 서서 후학을 가르치는 강단에 설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 추욱 사무관은 그 후 배재대 주간부 겸임교수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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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도의회의사당도 견학시켰다. 사진=김용교 제공 |
이기적이고 욕심으로 비쳐졌을 것을 생각하니 권희태 과장과 추욱 계장에게 미안한 생각이 크게 들면서 정하용 교수님께서 귀띔을 해주셨다면 나는 흔쾌히 재임용을 사양하였을 텐데… 하면서 지금까지도 그때의 상황판단을 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이 크게 남아있기도 하다.
물러날 때와 나갈 때를 아는 타이밍이 그렇게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치게 되었다.
김용교 (전 충남도정책기획관. 전 아산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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