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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114-한국의 부룩클린(Brooklyn) 성수동을 걸으며 맛에 빠져 본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최화진 기자

최화진 기자

  • 승인 2026-07-06 16:52

신문게재 2026-07-07 8면

과거 경마장과 수제화 공장이 밀집했던 낙후된 준공업 지역인 성수동은 낡은 건물을 개조한 카페와 문화 공간이 들어서며 현대적인 감성이 공존하는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청년 창업가와 예술가들의 유입으로 MZ세대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핫플레이스가 된 이곳은 연무장길을 중심으로 독특한 상업 공간과 맛집 거리를 형성하며 도시의 새로운 활기를 보여줍니다. 특히 성수동의 명물인 돼지갈비와 역사적 유래를 가진 함흥냉면 같은 풍성한 먹거리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미식 문화를 연결하며 방문객들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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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냉면./사진=김영복 연구가
서울의 핫플레이스 하면 떠 오르는 곳이 바로 성수동 카페거리다.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이곳을 혹자들은 한국의 부룩클린(Brooklyn)이라고도 한다.

1980년대 이후 제조업의 쇠퇴와 함께 낙후되어 있다가 1990년대 이후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힙합((hip hop)이 유행하여 신문화의 중심지로 재 탄생하였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 부흥하게 된 부룩클린(Brooklyn)이 성수동의 양상과 비슷하다.

산수(傘壽)에 접어 든 필자에게 이곳 성수동은 낯선 풍경이기는 하지만 도시의 짧은 역사를 말해 주는 역할은 가능할 것 같다.



성수동은 오래된 도시에 신세대의 힙한 감성이 더해져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게 된 데에 더하여 지리적으로 한강과 접해 있고, 작은 공장 창고 등으로 도심과 단절되어 있고, 오래된 도시철로가 있어 그늘이 진다는 점, 동네에 붉은 벽돌 건물이 많다는 점에서 2005년도에 필자가 가봤던 브루클린의 풍경이 흡사하다.

1928년에 지금의 동대문구 신설동에 세워졌던 경성경마장이 1954년에 이 지역으로 옮겨 와 뚝섬경마장이 되었는데, 그로부터 이 지역에 경마장이 있던 35년 동안 말똥 냄새가 진동을 하면서 거주 기피 지역이 되었다.

이 뚝섬경마장은 1989년에 과천으로 옮겨 가면서 렛츠런파크 서울이 되었고, 남은 경마장 부지는 한동안 방치되어 인근 지역이 구(舊) 경마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본래는 한강 변의 수려한 풍치지구로 각광받던 이 지역은 50년 동안 낙후된 주택가로 남았었다.

성수동에는 1960년대 형성된 준공업지역 기반의 거대한 레미콘 공장을 시작으로 구두 공장, 철공소, 인쇄소 등이 모여들었고, 한 건물에 여러 개의 공장과 사무실이 혼재하는 형태로 변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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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제화공./사진=김영복 연구가
특히 성수동은 한때 수제화 장인 등이 모여 있던 서울의 대표적 제조 거리였다. 거리 곳곳엔 가죽 냄새가 스며 있었고, 작은 공장과 작업장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그 당시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수제화에서 시작해 청년의 실험 무대로 이어진 흐름은 성수동의 공공 공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수동을 걸으며 그 장소들을 들여다보면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머무는 도시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잠간 수제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구두 한 컬레 값이 쌀 두 섬과 맞먹을 정도로 사치품이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양화점은 지금의 광화문인 황토마루에 이규익이라는 사람이 1898년 양화점을 열었다고 한다.

1910년「매일신보」가 창간된 이후 광고를 보면 구두를 한문으로 혜(鞋) 화(靴)으로 표기하고 있다.

위 황토마루 양화점은 이규익 씨가 운영하다가 개업 후 3~4년 안에 폐점했고, 박덕유(朴德裕)가 인수를 해 수 십년을 경영하던 중 1936년 「매일신보」에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러나 1925년에는 경성역(현 서울역) 화물 보관창고를 통해 가죽이 거래 되면서 이 일대에 잡화상과 구두수선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곳이 서울 중구 의주로2가 염천교 일대다.

당시 1930년 당시 구두 한 컬레 값은 8~9원으로 쌀 한 가마니와 맞 먹는 가격이었는데, 폴란드에서 수입하는 가죽으로 만든 구두는 값이 배나 되었다. 구두를 신는 고객은 주로 귀족이나 외교관이었다.

그 후 태평로에 피혁상회가 들어서면서 종로에 양화점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구두를 아껴 신으려 뒤 굽에 징을 박거나 비오는 날은 외출을 삼갔다.

일본 오사카 고베에서 매년 제화경진대회가 열렸는데, 1930년대 말 경성의 오사카 양화점에 근무하는 제화공이 최우수상을 탔다.

1950년 6.25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화를 재료로 피혁과 구두를 만들어 팔면서 염천교 일대는 수제화의 거리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60년대 경제성장으로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명동이 떠 오르고 명동에는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이 생기면서 싸롱화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짜장면 한 그릇에 50원하던 시절 수제화 남화가 1만4천원 여화가 8~9천 원이었으며 1975년에는 7만원짜리 수제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싸롱화의 붐을 타고 1963년 남일해의 대표 히트곡 '빨간 구두 아가씨'가 대 히트를 친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똑똑똑 구두 소리 어딜 가시나한 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발걸음만 하나 둘 세며 가는지빨간 구두 아가씨 혼자서 가네"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되면서 영화화하게 되고, 당시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는 '빨간 구두를 신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 진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고, 심지어 빨간 구두 품절 현상까지 일어난다.

금강제화를 중심으로 밀집해 있던 금호동의 구두공장들이 70년대 말 80년대 초 지방으로 이전하거나 성수동으로 자리를 이전하기 시작한다.

특히 지하철 2호선의 개통으로 교통접근성이 뛰어나고 봉제인력이 풍부한 성수동 피혁업체나 부자재업체들인 명동, 금호동, 염천교, 청계천에서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1996년~2000년 시기에는 서울 제화업체들의 약44%가 성수동에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IMF 금융위기 여파와 중국산 저가 상품으로 인해 성수동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고, 서울이 제조업 기능을 다른 도시로 넘기기 시작하면서 성수동은 활기를 잃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수동은 공장과 창고가 밀집해 있던 '도심의 공백 지대'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아차산로 주변으로 성수동 수제화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오래된 정미소를 개조한 문화 공간 '대림창고'가 문을 열며 옛날 감성과 요즘 콘텐츠가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로 화제를 모았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 비어 있는 건물들. 청년 창업자와 브랜드 기획자들은 이곳에 저만의 서사를 실험할 공간을 마련했다. 낡은 건물은 리모델링되었고, 과거의 구조는 새로운 감성으로 덧입혀졌다. 성수동의 상업 공간들은 그렇게 저만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조용한 말에 이끌려 하나둘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성수동의 상업 공간은 단순히 무언가를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트렌드가 탄생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오래된 공장지대, 구두 공방 골목으로 대표되던 성수동 연무장길이 트렌디한 카페와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지금도 자동차 정비공장과 인쇄 공장, 수제화 거리의 활기는 여전하지만,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장사이에 글로벌 외식 업체와 편집숍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성수동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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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카페거리./사진=김영복 연구가
이곳 성수동에는 MZ세대를 타겟팅으로 하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더 몰려드는지도 모른다.

뚝섬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오른쪽 샛길로 쭉 들어가면 경동초등학교 바로 왼편으로 난 길이 있는데, 여기가 연무장길이다. 그로부터 성수이로와의 교차점까지 약 600m의 골목길 주변으로 식당, 카페, 펍 등이 몰려있다.

이곳을 조금 지나면 건대 양꼬치골목이 나오고, 서울숲 4길에는 성수동 갈비골목이 있다. 뚝섬 갈비골목 또는 성수동 돼지갈비 골목이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갈빗집이 여럿 모여 있다. 특히 야외에서 즐기는 매콤한 비빔냉면에 달달한 돼지갈비는 성수동에서 새로운 맛의 추억들을 만들어 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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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면옥 함흥냉면./사진=김영복 연구가
필자가 성수동에서 맛집을 찾고 있을 때, 해병대 후배인 일신공영(주) 김형일 대표가 갈비찜 잘하는 맛집이 있다고 하여 서울 광진구 동일로32길 18 .1층에 위치한 '진진면옥 전화 0507-1386-9477'에 갔다.

이 집은 '함흥냉면'집으로 갈비찜과 함께 맛집으로 소문이 난 집이다.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집인데, 매콤새콤한 양념의 함흥냉면과 깊은 풍미의 갈비탕 맛이 인기가 있다. 이 집은 셀프바에서 온 육수와 밑반찬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더욱 만족스럽다.

특히 이 집의 갈비찜은 갈비 대에 붙어있는 살코기가 잡내가 없고 부드러운 것이 맛있다. 양념 또한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해서 얼마든지 많이 먹을 수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는 갈비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문헌을 살펴보면 소갈비는 협(脅), 돼지갈비는 박(拍)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인『세종실록(世宗實錄)』에 '돈박(豚拍)'이 나오는데, '박(拍)을 박(膊)으로 삼으니, 갈비(脅)를 이름이다'란 구절이 나온다.

우리 문헌에 갈비(乫非)라는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소선상(小膳床)」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년(1675) 9월24일에 사헌부(司憲府) 상소 내용에도 갈비가 등장한다. 인조 때는 소갈비나 돼비갈비를 연희 때 빠지지 않고 썼던 것으로 『일성록(日省錄)』에 자주 등장한다.

『일성록(日省錄)』정조 20년(1796년) 6월18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에 갈비찜(乫非蒸)이 올라 있고,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아의 등록류 문서들을 편집·정리해 영인한 사료집인『각사등록(各司謄錄)』순조(純祖)11년(1811년) 정월15일 '통신사왕회 시 광주부판교 참 거행등록(通信使往回時廣州府板橋站擧行騰錄)' 탕(湯) 육색(六色)에 갈비찜(乫非蒸)이 올라있다.

조선 말, 일제강점기의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6년~1939년)의 판소리 수제자 박봉술(朴鳳述, 1922년~1989년)의 춘향가에도 '갈비찜'이 나온다.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도 '귀신 같은 아이놈이 상 하나를 들어다가 놓으니, 어사(御使)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모조라진 상소반(床小盤)에 뜯어먹던 갈비 한 대'라는 대목이다.

언론인·수필가·동화작가였던 조풍연 (趙豊衍, 1914년~1991년)에 의하면 '예전에는 갈비를 짝(소갈비 양쪽 중 한쪽)으로 팔아 가정에서 명절이나 잔치 때 한 짝을 사다가 잔치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으며 그 외에는 가리음식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고 적었다.

갈비찜에 대한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중(中)자 하나 시켜 놓고 4명이 먹으니 금방 포만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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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찜./사진=김영복 연구가
갈비찜을 먹고 우리는 함흥냉면을 시켰다.

사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평양냉면은 메밀면의 구수함과 맑은 육수의 담백함, 함흥냉면은 전분면의 강한 탄력과 매콤달콤한 양념이 특징이다. 물론 평양냉면도 비빔양념이 있고 함흥냉면도 물냉면의 육수가 있다.

북한에서는 함흥냉면을 '농마국수'라 하지 냉면(冷)이라고 하지 않는다.

냉면은 오로지 평양냉면이고 평양냉면은 그들의 자부심이 깃든 전통음식이다.

북한을 세로로 두 축으로 나누면 오른쪽이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이다. 즉, 이 두 곳은 산세가 험하고 농지가 부족하여 메밀조차 잘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19세기 초 한반도에 감자가 전래 된 후 그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 강점기 함경남도 삼수군, 갑산군, 풍산군, 장진군 북부에 발달한 용암대지인 개마고원(蓋馬高原)에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했다.

그들은 감자의 전분을 추출해 부피를 줄여 수송에 편리할 수 있도록 함흥으로 모았다.

이 감자로 추출한 전분으로 알코올을 만들거나 공업용 전분으로 만들어 전쟁에 사용했다.

당시 공출하고 남은 전분으로 함흥 사람들은 국수를 만들었는데, 이를'농마국수'라고 불렀다.

농마국수는 1930년 전후 본격적으로 전국에 알려졌고, 후일 6·25 전쟁 당시 함흥에서 철수한 피란민들이 남한에 정착하면서 농마국수는 함흥냉면으로 이름을 바꿔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함흥에는 두 가지의 유명한 면요리가 있다. 하나는 전분 국수를 육수에 말아 먹는 '농마국수'가 있고, 국수를 비벼 가자미회를 얹은 '회국수'가 있다.

이렇듯'함흥농마국수'가 남한에서 냉면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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