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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마거리트 히긴스 연구소 소장이 히긴스 우표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한성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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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히긴스 연구소 소장이 히긴스 우표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한성일 기자 |
▲ 예. 저는 1981년 KBS 기자로 입사해 2013년 퇴직 때까지 30여 년간 KBS 취재기자로 뛰었고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KTV 국민방송의 국민리포트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재직 중 근현대사 자료의 중요성을 깨닫고 바쁜 취재 활동 속에서도 자료 수집에 전념해 의미 있는 개인 전시를 여러 차례 열었습니다. 지난해에는 유명한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을 맞아 6.25 전쟁 당시 유일한 외국 여성 종군기자였던 마거리트 히긴스의 국내외 자료를 인천시립박물관에 제공해 드리고 '불꽃같은 삶, 마거리트 히긴스 특별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앞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연속극 '똘똘이의 모험'을 담은 책자를 제공했고, 대한민국 생활 60년사 전시에 사라진 6.25 발발 신문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활용해 역사도시인 공주에서 ‘움직이는 박물관, 움직이는 뮤직박스’를 10여 차례 열었습니다. 또,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언론자료와 최초의 김삿갓 시집 등 소장 자료를 제공하는 기부 활동도 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잊혀져 가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했던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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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소장이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사들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한성일 기자 |
▲주변에서는 저를 마거리트 히긴스를 짝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녀는 1920년생으로 살아계시면 106살인데 마음 속으로 짝사랑만 하는 거죠(웃음). 히긴스는 1965년 베트남전 취재 중 풍토병에 걸려 이듬해 마흔 다섯에 별세하신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올챙이 기자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 특파원을 소개한 국내 번역본에서 처음 접했는데요. 6.25 전쟁 당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라는 점, 실제로 모델로 활동했을 정도로 미모의 여기자, ‘이브닝 드레스보다 미군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남자보다 더 용감한 아름다운 여자’라는 특이한 수식어(지난해 특별전 관람객들이 대부분 영화배우냐, 모델이냐 할 정도), 특히 인천상륙작전 종군기사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90년대 초 서울 광화문에 있었던 한 단골 고서점에서 <War In Korea>의 한국어 번역본인 <한국은 세계의 잠을 깨웠다>라는 책자를 입수하고 나서 국내외에 걸쳐 본격적인 히긴스 자료 수집에 나섰습니다. 한 점 한 점 구할 때마다 그녀만의 매력과 마력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녀가 약관 20세 때 신문기자가 됐을 때 미국에서 처음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휴일 스케치를 동물 취재 기사로 써서 큰 주목을 받았던 점, 그리고 남자 기자들도 못해냈던 장개석 부인 쑹메이링 등 유명 인사와의 인터뷰를 자신만의 기지를 발휘해 여러 차례 성공시킨 점, 베를린 봉쇄나 유대인 수용소 최초 취재, 냉전 후 첫 소련 일주 취재 등 유별난 수많은 특종 취재를 자료를 통해 접한 순간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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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긴스 기자가 맥아더 장군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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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소장이 한국전 참전 장병들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한성일 기자 |
▲지난해 9월12일부터 10월19일까지 인천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불꽃같은 삶, 1950년 9월 인천의 마거리트 히긴스 특별전>을 열었는데 국내외 언론계 인사와 방문객들이 찾아와 그동안 히긴스 기자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며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개인 연구소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를 대한민국 국민 5000만 명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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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 사진= 김점석 소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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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소장이 한국전 파병용사들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한성일 기자 |
-'한국전쟁을 취재한 유일한 여성 종군 기자'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에게 히긴스는 낯선 이름인데요. 그녀를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노벨 평화상 또는 노벨 문학상 수상 가치가 큰, 세계 최고의 여성 기자이자 위대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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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긴스 기자가 풀리처상을 수상한 인천상륙작전 기사를 설명하고 있는 김점석 소장. 사진=한성일 기자 |
▲ 6.25 전쟁이 터지고 이틀 뒤 미 수송기를 타고 서울로 들어와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있던 중 한강 인도교가 폭파돼 간신히 나룻배를 타고 넘어 오면서 서울 탈출기를 르포 형식으로 자세히 써 1면을 장식한 것을 비롯해 수원-대전-통영 등 최전선을 거치는 동안 지프차에서 타이프를 쳐 기사를 작성하면서 미군의 첫 북한군 접전 현장을 비롯한 최전선의 전투 현장, 피란민 모습, 장진호 전투 등 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생생하게 전한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특히 처음에는 여자가 배를 타면 뒤집어진다며 미 함장들이 승선을 거부했던 인천상륙작전에 뛰어들어 빗발치는 탄우 속에서 도 누구보다 생생한 현장 종군기사로 1면을 장식해 전 세계인들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히긴스의 저서에서 북한 공산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도 새겨볼 만합니다. 병력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고, 탱크를 보유하고 있는데 개전 초기 미군의 바주카포는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주의의 팽창을 경계하면서 코리아 지원의 필요성을 종군 기사와 저서로 역설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WAR IN KOREA>를 보면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자명종 시계의 역할을 했다. 공산 세계는 1945년 이후 말로는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해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그의 날카로운 시각이 미국은 물론 서방세계에 공산국들의 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히긴스 기자의 역저인 <War In Korea>는 6.25 전쟁 최초의 취재기 저서로 대한민국의 기자든 일반인이든 모두가 원본이나 번역본을 꼭 일독해볼 가치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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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긴스 기자가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천상륙작전 기사를 설명하고 있는 김점석 소장. 사진=한성일 기자 |
▲그녀의 투철한 기자정신, 즉 직업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6.25 전쟁 이후까지 종군 기자로 유명세를 떨치고, 한국을 도와주려고 앞장섰던 종군기자라는 점에서 모든 한국인들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입니다. 과거 외국 언론계는 여성 기자를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여성의 몸으로 전쟁터에 뛰어들어 특별대우가 아닌 남성 기자와 똑같이 최전선을 지키면서 용맹스러운 기자 정신을 발휘했던 점, 미 장군으로부터 여성 기자라고 해서 질시와 배척을 받았지만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을 정도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로 기념 우표까지 다수 발행했는데 한국인 대부분, 특히 많은 국내 언론인들조차 그녀의 존재를 잘 모른다는 점이 너무도 안타까워 그렇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의 개입에 앞장서 반대했지만 한국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할 값어치가 있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삼 6.25 당시 3만 명이 넘는 젊은 미군이 먼 한국 땅에서 자유를 지키다 전사한 숭고한 가치를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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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긴스 기자 저서 <<War In Korea>를 보여주고 있는 김점석 소장. 사진=한성일 기자 |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미-소 냉전을 시작으로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쳐지고, 국공내전에서 중공군이 이겨 중국을 지배하는 등 공산주의가 급속도로 팽창해가는 시점에서 6.25가 터진 것입니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업은 북한군 등 공산권과 UN 16개국 자유 우방 사이의 국제전 성격을 띠면서 반공주의자였던 히긴스 기자의 존재는 공산권에 밉보일 정도로 소련에서는 6.25 중 여성 기자라는 이유로 일시 퇴출당한 히긴스 기자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보다 생생한 종군 기사와 저서 <War In Korea>를 통해 “공산권은 언제나 자유 서방의 빈틈을 노린다. 그리고 서방세계가 경계와 긴장을 늦추면 그걸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긴다. 한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자명종 역할을 했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녀의 종군 활동은 전 세계인들에게 공산화 야욕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험한 불장난을 종군 취재 활동 중 예리하게 직시한 것입니다. 그녀의 퓰리처상이 당시 미국은 물론 세계 언론의 큰 관심을 끈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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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렸던 마거리트 히긴스 특별전시장에서 김점석 소장과 관계자들이 테이프 커팅하고 있다.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 '현장에 답이 있다' 는 말처럼 언론인과 현장은 불가분 관계입니다. 언론인은 현장을 지켜야 하는 사명감과 의무감이 따릅니다. 히긴스 기자가 그녀의 저서에서 갈파했듯, “위험한 곳이 전쟁터이며 위험하지 않으면 기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 위험하기 때문에 기자가 있다”는 그녀의 말씀은 명언 그 자체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현장의 목격자로서 팩트 전달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숙명이자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분쟁지이든 전쟁터이든 그 곳의 실상을 정확히, 신속히 알리는 전달자가 돼야 합니다. 특히 21세기 민간인의 피해와 고초가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아랍 전쟁, 미국-이란전은 더더욱 현장에 기자가 반드시 24시간 붙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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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렸던 마거리트 히긴스 특별전시장에서 김점석 소장이 관객들과 특별대화 시간을 가졌다.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 커다란 짐보따리를 이고 피란을 가는 수백 명의 한국 여인들, 끊어진 한강 다리, 서울을 탈출하면서 그녀가 탔던 한강 나룻배, 진흙탕에 빠진 기자와 미군이 탄 지프차를 꺼내주던 주민들이 살던 초가집, 히긴스 기자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서울을 탈출해 수원으로 가면서 언급한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전쟁 속 한국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한강 다리와 아파트가 서 있고 고속도로가 뻥뻥 뚫려 있는 것을 보셨다면 70여 년 전 한국의 모습은 비현실적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수원에서 대전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지프차를 타고 미군들과 후퇴했다는 히긴스 기자의 저서 속 고행 기록을 보노라면 최고의 풍요로운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전사한 수많은 국군과 학도병, 젊은 UN군 병사들의 숭고한 희생, 그리고 6.25 전쟁을 기록하다 숨진 국내외 종군기자 열여덟 분의 안타까운 죽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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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소장이 마거리트 히긴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에게 히긴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전쟁 발발 76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우리 사회가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데요. 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직도 대한민국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입니다. 지난 1953년 7월 휴전 이후 북한은 같은 동족인가 싶을 정도로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만 사망· 부상 등 99만 명에 이산가족만 1000만 명입니다. 군인만 죽은 게 아니고 무고한 민간인 피해도 엄청납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 이후 어떻게 했나요.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간첩을 보낸 1.21 사태, 삼척 울진 무장공비 침투 사건, 동해 56함 포격 사건, KAL기 납북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아웅산 테러, 김포공항 테러, KAL기 폭파 사건,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사건,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나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면 세계는 힘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언젠가는 남북한이 민족 화해와 통일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과거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갈파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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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소장이 마거리트 히긴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에게 히긴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소장님은 가짜뉴스와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이 시대에 히긴스의 언론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히긴스 기자는 철저히 현장과 사실에 입각한 내용을 취재하고 기사를 썼습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것을 기사에 녹여낸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토대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저서도 펴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사실 확인도 안된 가짜뉴스가 버젓이 나돌고 있습니다. 저도 특종 보도를 여러 차례 했는데 사실 확인 또 확인을 해야 했습니다. 언론기관은 언론인에 의해 움직이는 만큼 기자 개개인의 철저한 사실 확인을 거치는 올바른 취재 자세가 중요합니다.
한가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정치인들이 있는데도 그 발언이 기사로 또 전파를 타고 끝없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언론이 걸러내야 하지만 그에 앞서 국회의원들의 면책특권을 모두 없애야 합니다. 헌법기관이라고 자처하는 의원들이 정쟁에 몰두한 나머지 민감한 내용의 가짜 내용을 마치 사실인 양 포장해 공식 석상인 국회에서 터뜨린다면 헌법을 기만하는 무자격자일 뿐입니다. 가짜뉴스를 진짜 뉴스처럼 큰소리치고도 책임을 지는 정치인을 보기 힘듭니다. 더더욱 언론을 통해 이런 가짜뉴스가 펴진다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 것입니다. 의혹이나 의심이 가는 부분을 일단 터뜨리고 보는 정치인이 있다면 언론이 나서 이를 철저히 사실 확인을 하고 책임을 묻도록 따지고 또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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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석 소장이 기획한 ‘움직이는 박물관 물건으로 보는 시간여행’ 관람객들.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 미군 대령이 "여기는 당신 같은 여자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고 짜증스럽게 이야기하자 히긴스 기자는 "위험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위험한 사태가 뉴스이고 뉴스를 수집하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 "라고 맞섰습니다.
6.25 전쟁 당시 미군 장성들도 여성인 히긴스 기자에게 한국에서 나가달라며 심하게 배척하고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전선에는 여성들을 위한 화장실 같은 편의시설이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여성인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미국 국민들이 나를 용서치 않을 것이니 제발 죽거나 포로가 되지 마시오.” 라면서 실제로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취재를 위해 탑승을 요구했지만 해군의 전통상 군함에는 엄격히 여성의 탑승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박해를 받았지만 꿋꿋이 참고 맞서나간 진정한 영웅이 히긴스 기자입니다. 나중엔 신문사 도움과 맥아더 장군의 열린 마음으로 한국에 복귀했지만 말이죠. 또, 6.25 취재 중 그녀의 집요함과 탁월한 기사는 다른 남성 외국 기자들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남성 외국 종군기자는 그녀의 무모한 취재를 뒤쫓느라 다른 기자들 모두 힘들어하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남성 기자를 능가하는 저돌적인 기자였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벼룩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허리, 허벅지, 발목 등 몸 전체에 온통 벼룩에 물린 상처...살충제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바닥 위에 보잘 것 없는 담요 한 장을 깔고 잠을 청했다. 뼈가 쑤실 정도의 피곤함, 바주카포 교전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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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의 종군 기자 시절.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당시 한 미국 신문은 사설에서 "그녀의 야심은 성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기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히긴스 양은 이를 좋아할 것으로 믿는다" 고 썼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 언론계에서 일하는 여기자가 불과 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요. 70년대 초 한 국내 언론사 간부(고제경 동화통신 부사장)는 퓰리처상을 탄 히긴스 기자 같은 대기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오길 기대한다는 칼럼을 쓸 정도로 그녀의 명성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정말 엄청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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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마거리트 히긴스 전시회를 할때 굿즈 상품 안내를 하고 있는 김점석 소장.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젊은 후배들에게 ‘뜨겁게 살아라. 포기하지 말아라. 끝까지 도전해라, 소신이 있다면 부당한 자에게 떳떳이 맞서라. 힘없는 서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인간의 존엄을 알리는 일은 언론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장님은 히긴스가 보여준 인간애와 사명감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기자도 전쟁터에서는 한 인간입니다. 6.25 전쟁 중 히긴스 기자는 본인의 혈액을 장병들을 위해 기꺼이 투여했습니다. 그녀의 저서 번역서 178~179쪽 "총알이 응급치료소가 있는 학교 가장자리로 날아왔다. 위생병이 부상병들에게 혈장을 투여하다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남은 혈장을 투여하겠다고 제의하고 한 시간 동안 머물며 최선을 다해 도왔다. 마이 캘리스 대령은 나를 칭찬하는 편지를 편집인들에게 보냈다. 학교 건물 전투가 끝난 뒤 나는 지프차를 탈 때 카빈총을 갖고 탔고 전직 해병에게 사용법을 배웠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마태오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히긴스는 또 장성들과 본국 정부에서는 듣기 싫을 장병들의 전쟁 혐오 목소리를 가감없이 기사로 전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는 마태오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고 했습니다. 히긴스 기자는 전쟁터에서 열띤 취재 경쟁을 하며 남자 기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샀지만 바닥이나 참호 속에서 잠자고 풀밭에서 용변을 보고 벼룩과 함께 생활하며 장병들과 똑같이 최전선을 누볐습니다. 히긴스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해외특파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은 그들이 부지 중 거물들의 친구나 심복 노릇을 하게 되어서 자기 자신이 신문기자라는 것을 잊어버리게까지 되는 것이다.”
히긴스는 오로지 전쟁 현장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고 취재 열정을 불태워 미군 장병들의 존경을 받은 유일한 여기자였습니다. 한 미국 병사는 그녀를 가리켜 “당신은 내가 형제로 삼고 싶은 아가씨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새삼 히긴스 기자님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저서에서 그녀는 "우리는 재앙을 본대로 보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적과 전투를 벌이는 미군 병사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얼마나 간절히 알리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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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 .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신문 창간과 복간이 봇물을 이뤘습니다. 어릴 적 중학생 때부터 신문과 방송에 관심이 많아 아폴로 11호 달 착륙 신문 스크랩과 최초의 올림픽 한국 금메달 중계방송, 박정희 대통령 서거 방송 속보 등을 녹음해둔 테이프 등을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할 말은 하기 시작했던 민주화 항쟁 직후 집중적으로 창간호와 복간호를 수집하면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이 땅을 밝히는 촛불 역할을 했던 가톨릭 교회에서 발행한 평화신문 창간호 구입은 물론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일간지인 중도일보 창간호를 구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추후 좋은 근현대사 자료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금껏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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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을 찾은 나태주 시인(사진 오른쪽)과 함께 한 김점석 소장(사진 왼쪽).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 방송의 힘, 특히 종교방송의 힘이 큽니다. 2000년 전 나에게 길이 있다며 우리 대신 희생하신 예수님의 고행 속 말씀 하나하나의 의미를 전할 때마다 순간순간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땅에서 평화방송이 진정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잘못 하여 나라가 잘못된 역주행 길로 빠지고 있습니다. 이때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주는 게 평화방송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과거 민주화투쟁 때 가톨릭 명동성당이 핍박받은 자들의 피난처가 됐듯이 살 만큼 살 수 있게 된 요즘, 이 땅에 메마른 정의를 다시 꽃피우는 십자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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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종군 여기자로 퓰리처상을 받은 마거리트 히긴스 사진전의 도록.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예리한 필봉과 함께 생생한 현장 종군기로 반전 여론의 확산에 일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희생에 대한 강력한 질타가 있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전에 미국의 개입을 반대했던 논조처럼 말이죠. 첨단 현대전의 더 많은 비극과 참상에 경종을 울린 영원한 종군기자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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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긴스 기자의 퓰리처상 수상작인 인천상륙작전 기사에 대해 김점석 소장이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성일 기자 |
▲제가 지금 공주에서 생활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모든 근현대사 자료로 움직이는 박물관, 움직이는 뮤직 박스를 10여 차례 열었어요.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굉장히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인기가 꽤 좋았습니다. 올해는 6.25전쟁 76주년, 마거리트 히긴스 서거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으면 실체가 있어도 모르거나 없는 일 취급 받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언론인에게 자료는 역사의 실체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히긴스의 자료가 총 200여 점이 되는데요. 모아놓고 그냥 두긴 아깝잖아요. 그래서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여서 전시회도 열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자료가 많다 보니 아파트 생활해서는 다 넣어둘 수 없어서 금산으로 갔다가 지금은 공주에 있는데요. 그동안 손때 묻은 자료가 1만 여 점은 되는 거 같습니다.
1964년 국내에 처음 출시된 ‘비틀즈 레코드’, ‘김삿갓 시집 초본’ 등 다양한 자료가 있는데요. 근현대 자료를 모으는 것이 저의 큰 즐거움입니다.
언젠가는 월급을 다 쏟아 부은 적도 있고, 월급으로는 부족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든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귀 자료를 손에 넣었을 때의 그 뿌듯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광복 이후인 1946년경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똘똘이의 모험>이란 어린이 라디오 연속극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프로그램이라 관련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그런데 그 대본을 경매를 통해 정말 어렵게 구했어요. 지난 전시에 내놓았는데 언론에 보도돼 화제가 됐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당시 똘똘이를 연기했던 성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만나서 보여드렸더니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하시더라고요.
기자가 남긴 기록은 스토리이자 히스토리입니다. 기자의 기록들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애환, 수난의 역사, 고단했던 지난 삶을 돌아볼 수 있죠. 이렇게 수집을 통해 전달된 역사가 다음 세대가 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이 되었으면 합니다.
대담, 정리=한성일 편집위원(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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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리트 히긴스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점석 소장. 사진=김점석 소장 제공 |
▲195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부속 고등학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1년 KBS 기자 입사, 2001년 KBS 공주방송국 방송부장, 2001년 KBS 대전방송총국 편집부장, 2003년 KBS 대전방송총국 취재부장, 2006년 KBS 대전방송총국 심의위원, 2008~2010년 KBS대전 팡팡뉴스 앵커, 2012~2016년 KBS대전 생생뉴스 앵커, 2013년 퇴직, 현재 문체부 운영 KTV 국민리포트 전문위원
1984년 <불건전한 기업만화 실태 보도> KBS 보도은상, 1986년 <설악산 산양> 취재 KBS 보도금상 공동수상, 2004년 한국언론재단 주최 홈페이지 대상 은상 수상, 2012년 <알뜰주유소 졸속 추진> 목요언론인클럽 '이달의 기자상' 수상.
<주요전시>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KBS대전 주최 <빛, 소리, 영상전> 소장 자료 제공, 2010년 개인 소장 <방송자료 전시> (대전프랑스문화원), 2013년 개인 소장 <언론자료 전시> (대전프랑스문화원), 2021년~2023년 공주에서 <움직이는 박물관>, <움직이는 뮤직박스> 10여 회 운영, 2025년 인천상륙작전 75주년 기념 <불꽃같은 삶, 마거리트 히긴스 특별전> , 히긴스 기자 소장 자료 제공 (인천시립박물관), 2026년 6월 마거리트 히긴스 연구소 출범
마거리트 히긴스 자료 주요 언론 소개, 2020년 국방TV, 다큐 <기록> 프로그램에 히긴스 소장 자료 소개, 2020년 동아일보, 마거리트 히긴스 소장 자료 소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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