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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118-서울의 향토음식 설렁탕 백여 년의 맥을 이어 온 이문설렁탕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최화진 기자

최화진 기자

  • 승인 2026-08-03 17:21

신문게재 2026-08-04 10면

1907년에 문을 연 '이문설렁탕'은 1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노포로, 조선 시대 피맛골 서민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서울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점입니다.

설렁탕은 신분제가 철폐되던 구한말부터 대중적인 외식 및 배달 음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선농단 제사설 등 다양한 유래와 함께 서울 외식 문화의 중심에서 그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김두한, 손기정 등 수많은 명사가 즐겨 찾던 이곳은 현재까지도 종로에서 한국 탕반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를 지키며 역사적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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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사진=김영복연구가
정말 오랜만에 종로에 있는 「이문설렁탕」을 방문했다.

이 집 주인인 전성근 사장은 90년대 초까지 만났으나 그 이후 어인 일인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찾아가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계산을 하면서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주인(전혜령)에게 물으니 전성근(田聖根) 사장은 2022년에 작고하고 부인인 자신이 직접 경영한다고 한다. 「이문설렁탕」은 120년이 넘은 전국의 노포(老鋪) 중에도 제일 오래된 집이다.

19세기 말인 조선시대에 한양의 중심인 종로 큰길에 말을 탄 고관대작을 피하려 서민들이 이용한 좁은 뒷길이 있는데, 이 골목길을 피마(避馬)골이라 한다.

이곳은 탕반집, 장국밥집, 팥죽집, 떡집, 선술집, 목로술집, 모주집, 색주가 등이 집중된 서민들의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피맛골 일대에 있던?순화궁의 이문(里門)에 있던 이문고개[里門峴]의 야경꾼들이 보초를 서던 초소를 이문(里門)이라 했는데, 이러한 마을 경계의 초소는 세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 이문(里門)안에 있는 큰 목로들의 술국이 특별히 맛이 있다고 해서 새벽부터 손님으로 붐볐다고 한다.

이곳에 1907년에 세워진'이문식당'(里門食堂)'이다. 이'이문식당'(里門食堂)'이 오늘날「이문(里門) 설렁탕」의 전신이다.



설렁탕이 언제부터 식당에서 전문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은 없지만 설렁탕이 서울의 향토음식 임은 틀림없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의 육성 자료에 의하면, 지금의 종로 3가 단성사 옆에는 형평사 부회장을 하던 원씨 성을 가진 노인이 설렁탕집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씨 성을 가진 노인이 처음 설렁탕집을 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식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양반들은 보통 사랑채나 후원 혹은 별장으로 지어놓은 별서(別墅)라는 건물에서 야연(野宴)을 즐겼다고 한다.

관리들 역시 관아에서 음식을 장만하게 하고 의녀(醫女)나 기생을 불러 흥취를 돋우며 술과 식사를 함께 하는 외식을 했을 뿐이다. 당시 양반 관리들을 위한 고급 식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1894년 조선의 고종은 개화파의 입장을 수용하여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법으로 정한 바가 있었으나 소를 잡는 백정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비천한 계급 취급을 받았다. 실제 속으로는 쇠고기를 좋아해서 어쩔 줄을몰라 했겠지만, 도살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조선 사람들 사이에 팽배했다. 결국 백정들은 오늘날의 정육점인 현방(懸房)을 직접 운영하면서 그 부산물로 만드는 설렁탕집을 함께 운영하여 계급 타파의 결실을 따 먹고 있었다. 이런 탓에 천민으로 취급되었던 옹기 장인들이 만드는 뚝배기에 설렁탕을 담아낼 수밖에 없었고, 그 값도 싸서 설렁탕집은 서민들이 애용하는 식당이 되었다.

1927년 10월 1일에 발간된 『별건곤(別乾坤)』(제9호)이란 잡지의 '추탕집 머슴으로 이틀 동안의 더부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조선의 설렁탕과 선술집은 세계적으로 명물이 될 만하다. 아주 민중적이요, 민중의 일 바쁜 표시를 보여주는 현상이라 좋다."고 기록했다.

당시 설렁탕이 식당을 만들었고, 식당이 대중을 만들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건곤』 24, 1929.12, 66면에 우이생(牛耳生)의 '괄세못할 경성(京城 )설넝탕',에 '南門 박잠배[紫巖] 설넝탕을 제일로 처서 동지 섯달 치운 밤에도 10여리 박게 잇는 사람들이 맛치 녀름날에 정릉(貞陵) 물마지나 악바위골 약수(藥水) 먹으러 가덧이 쟁두(爭頭)를 하고 갓섯지만은 지금은 시내 각처에 설넝탕 집이 생긴 까닭에 그것도 시세(時勢)를 일엇다. 시내 설넝탕집도 수(數)로 치면 꽤 만치만은 그중(其中)에는 종로 이문(鍾路 里門)안 설넝탕이라던지 장교(長橋)설넝탕, 샌전 일삼옥(一三屋)설넝탕이 전날 잠배설넝탕의 세도(勢道)를 계승(繼承)한 듯하다. 고 나온다.

남대문 밖의 잠배가 유명해진 것은 남대문 밖에 형성된 칠패시장 때문이었다. 한강에서 올라오는 어물과 삼남의 물산들은 한강을 거쳐 칠패시장을 통해 유통되었다. 남대문 안쪽에 있던 선혜청(宣惠廳) 창내장(倉內場)과 바깥의 칠패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잠배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하루를 시작했다. 잠배에는 음식점 거리가 있었다.칠패시장은 어물을 주로 팔았기 때문에 새벽부터 장이 열렸다. 새벽에 거래가 이루어지고 남대문이 열리면 상인들과 사람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성문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팔았다. 그러나 번성하던 칠패시장은 1900년 경인철도 남대문정거장이 세워지면서 급속하게 몰락한다. 철도가 한강과 남대문 사이의 흐름을 막은 것이었다. 게다가 남대문 안쪽에는 남대문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남대문 밖의 상권은 급속도로 사라진다. 남대문에서 남산과 을지로, 충무로까지 일본인들에 의한 상권이 형성되고 종로를 중심으로 한인상점들이 형성되면서 설렁탕집들도 자연스럽게 경성 시내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이어서 '이러한 사정들을 보면 4대문 밖 하층계급의 음식이었던 설렁탕이, 중, 청년은 의사에게 '15전짜리에 고기 5전어치를 더 넣은 설렁탕'이라고 하면서 국물이 식는다며 빨리 먹으라고 난리는 피운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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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피마골./사진=김영복연구가
그렇다면 설렁탕 유래와 최초의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설렁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선농단 제사관련설이다.

1739년(영조 15)에 재위 중 최초로 친경 의례를 거행한 이후 총 4차례에 걸쳐 친경을 거행하였는데, 1747년(영조 23)에는 적전에서 재배한 보리를 베는 것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인 '관예(觀刈)' 즉 친예를 거행하였다.

보리는 청의(靑衣)와 청건(靑巾)을 착용한 서인(庶人) 40명이 독시관(督視官)의 감독하에 각기 기계(器械)를 잡고 동·서로 나뉘어 밭이랑으로 들어가 차례로 두 사람이 나란히 베었다. 보리를 벨 때, 독시관이 동·서에서 서로 향하여 서면 음악이 연주되고, 베기를 마치면 음악이 그쳤다. 벤 보리는 죽상(竹箱)에 담아 왕에게 올렸다. 왕이 곡식을 살펴보는 절차가 끝나면 보리를 벤 40명이 관예대 아래로 와서 네 번 절하였다. 왕이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참여자들의 수고를 위로하도록 명령함으로써하사한 음식이 농민들에게 퍼져 설렁탕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친경례(親耕禮) 때 농사를 한 농우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다.

왕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을 행하는 친경례(親耕禮) 후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한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연회가 '노주의(勞酒儀)'다.

조선시대 친경례는 [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6(1475년) 1월 25일에 처음으로 거행하였는데 노주의는 그 다음날에 있었다. 서울 동쪽 교외 전농동에 있었던 동적전(東籍田)에서 거행하는 친경례와 달리 노주의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에서 거행하였다

민간에서 널리 먹는 설렁탕의 유래를 친경례의 '노주의(勞酒儀)'에서 찾는데,『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어디에도 친경(親耕) 후 농우(農牛)를 잡았다는 기사는 없다. 오히려 '노주의(勞酒儀)' 때에는 농우(農牛)를 도살할 수 없다고 하여 돼지고기로 대신하였기 때문에 설렁탕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다.

1937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선농단(先農壇)에서 세종대왕이 제사를 지낼 때 큰 비가 내려 발이 묶이자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임금이 명을 내려 제사 지냈던 소를 잡아 선농단에 참석한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이 기사 말고는 어느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가 불분명한 탓에 선농단의 설렁탕 설은 믿기 어렵다.

오히려 『영조실록(英祖實錄)』?15년 1월 18일에 보면 '노주의(勞酒儀)'는 농경을 매개로 농민과 농우가 나라로부터 크게 대접받는 의식이었다.

설렁탕의 어원과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선농단설 말고도 많다. '고기 삶은 물'을 뜻하는 '공탕(空湯)'의 몽고말인 '슐루(슈루)'가 음운 변화를 거쳐 '설렁'이 되었다는 설, 개성의 '설령(薛鈴)'이라는 사람이 고려 멸망 후 한양으로 옮겨 탕반 장사를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 설령에서 설렁이 유래했다는 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면서 이두 전문가였던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1938년에 쓴 '잡고(雜攷)'에 '설넝은 잡(雜)이다'라고 말한 '설렁 잡설'까지 설렁탕의 어원과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많고 다양하다.

최초의 기록은 1897년 1월 21일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발간된 게일(Gale, J S )의 '한영자뎐(韓英字典)'에 나오는 '셜넝탕 A stew of beef intestines'(소의 내장으로 끓인 국)이다. 설렁탕은 셜렁탕, 셜넝탕, 설넝탕, 설녕탕, 설농탕(雪濃湯) 등 1950년대까지 표기가 통일되지 않고 사용된다.

구한말 당시 가장 보편적 외식은 탕반(湯飯)이었다. 고기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하고 고기를 넉넉하게 넣은 '장국밥'은 양반과 부자들의 탕반이었고, 소의 모든 부위를 넣고 끓여낸 뒤 소금으로 간을 한 설렁탕은 서민 탕반의 대명사였다.

당시 설렁탕집은 소머리 뼈를 가게 앞에 진열해 놓았다. 1920년대의 신문과 잡지들은 한결같이 설렁탕을 서울의 명물로 기록하고 있다. '탕반 하면 대구가 따라 붙는 것처럼 설넝탕 하면 서울(경성)이 따라붙는다. 이만큼 설넝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설넝탕 팔지 않는 음식점은 껄넝껄넝한 음식점이다.'(192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그렇다면 설렁탕은 어떻게 끓일까?

설렁탕은 사골과 도가니, 양지머리 또는 사태를 넣고, 우설(牛舌), 허파, 지라 등과 잡육을 뼈째 모두 한 솥에 넣고 끓인다.

설렁탕에 허파나 창자를 넣기도 하나 곰탕보다 뼈가 많이 들어가서 국물이 한결 뽀얗다. 곤자소니는 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 많은 부분이고, 도가니는 무릎도가니와 소의 볼깃살 두 가지인데 보통 무릎도가니를 말한다.

설렁탕은 먹는 사람이 소금과 파를 넣고 간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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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설농탕./사진=김영복연구가
1907년 구한말에 세워진'이문식당'과 1920년'이문설농탕'이 설렁탕을 팔던 식당이었다.

건대 농대를 나온 「이문설농탕」의 대표 전성근 씨에 의하면 홍종환(洪鍾煥)씨가 운영하던 설렁탕집은 '양'씨 성의 주인이 일제강점기에 식당을 인수했다고 한다.

1960년에 전 씨의 어머니인 유원석(柳元石 2002년 작고) 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양'씨에게서 가게를 인수한 뒤 1981년 전성근씨에게 대물림했다고 한다.이문식당은 일제강점기 내내 설렁탕의 대명사였다.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洪鍾煥)은 일제강점기 사회면을 여러 번 장식한다. 노동자들에게 떡국을 기증하는 등 미담의 주인공으로 여러 번 등장했고 이문식당 배달부들의 횡포와 여름철 냉면을 팔다가 종로경찰서에 단속되는 일들도 빈번했다. 설렁탕은 지금의 짜장면처럼 당시에는 대표적인 배달음식이었다. '설렁탕 그릇을 목판에 담아?어깨에 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배달을했다. 이문식당에만 1939년에 십수 명의 배달부가 있었다고 한다. 관공서와 경찰서가 단골 주문처였다. 이문식당 근처에 있던 종로경찰서는 설렁탕을 자주 시켜 먹었다.

경찰들은 물론 피의자들도 설렁탕을 먹고 '숨을 내쉰' 뒤 취조를 받았다. 설렁탕 집들은 새벽부터 장사를 하거나 아예 하루 종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밤낮이 없는 경찰서의 단골 음식이 된 것이다.이문식당 주인 홍종환은 일제강점기 서울의 고급 요리점을 대표하던 '명월관' 주인 이시우와 어울려 당구를 즐겼다. 종로를 주름잡던 김두한은 한때 이문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으며 이문식당의 단골이었다.

그 외에도 이시영 부통령,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 이희승박사 및 연예인 체육인 등 다수의 명사들의 단골이었다고 한다.외식이 본격화한 19세기 말 한성에서 경성으로, 다시 서울로 수도의 이름이 변하는 격랑의 시대 속에서 설렁탕은 서울 외식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탕과 밥을 먹는 한민족의 음식문화가 지속되는 한 설렁탕도 살아남을 게 분명하다.강북의 도심에「이문설농탕 :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38-13 전화 02-733-6526」은 120여년의 맥을 이어가며 최고급 한우 설렁탕 같은 새로운 설렁탕을 등장시키며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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