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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123- 서민의 애환을 달래 주던 종로 열차집 고소한 맛 '빈대떡'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최화진 기자

최화진 기자

  • 승인 2026-09-28 17:04

신문게재 2026-09-29 10면

1954년 창업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노포 '열차집'은 맷돌로 간 녹두 반죽에 어리굴젓을 곁들인 빈대떡으로 피맛골의 역사와 서민들의 애환을 70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식당은 창업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우제인 대표가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신메뉴 개발을 통해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으며 종로의 상징적인 맛집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빈대떡은 조선 시대 문헌 속 '빙쟈'에서 유래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적선떡이나 손님 접대용 음식 등 다양한 설을 간직한 채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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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떡./사진=김영복연구가 제공
세월의 흔적이 완연한 서울의 노포(老鋪)에 가 취재를 하려니 혼자 빈대떡을 먹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종로 근처에 있는 향우(鄕友) 두 사람을 점심시간에 맞춰 불렀다.

한 사람은 종로구청에 근무하는 장석규 향우와 서소문에서 법무사 사무소 사무장으로 일하는 이승수 향우다.

저녁 같으면 대한민국 막걸리는 다 판다는 이 집에서 빈대떡과 함께 막걸리 한잔하며 향우회 이야기와 고향 이야기도 하겠지만 온전히 내 취재를 위해 참여해 빈대떡 각 두 장씩 점심 식사 대신으로 먹고 가게를 나왔다.



종로구 공평동 옛 제일은행 뒷편 골목에 터를 잡고 있는 '열차집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7길 47 전화: 0507-1440-2849)'에 만약 저녁 시간이라면 손님들이 식당 안을 꽉 채웠을 터이지만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한 테이블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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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집./사진=김영복연구가 제공
열차집의 창업자는 행상(行商)을 하고 지내던 고인(故人)이 된 경기도 용인 출신 안덕인씨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1954년 세종로 뒷 길 (지금의 교보문고 뒤에서 종로소방서 쪽으로 가는 길가) 옛 중학천변 한옥(韓屋)의 담 틈에서 즉석에서 맷돌로 갈아 만든 녹두 반죽에 돼지고기 고명이 올라간 빈대떡과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다.

특히 이 집의 시그니쳐 메뉴는 빈대떡에 시원하고 짭짜름한 어리굴젓을 얹어 먹게 하여 인기를 더 끌었다.



추녀 밑에 길게 의자를 놓고 빈대떡을 파는 이 집을 보고 사람들은 '기차집'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당시 피란길 기차 칸처럼 엉성한 의자만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 종로 피맛골 초입으로 이전하며 간판 없이 손님들의 입으로만 불리던'기차집'에서'열차집'이라는 상호 간판을 달고 영업을 시작했다.

'열차집'이라는 정식 간판을 내건 이후에도 손님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도 이 심심하고 담백한 열차집의 빈대떡을 좋아해 비서관을 시켜 가끔 사갔다고 전해진다.

피맛골 즉 '피맛(避馬)길'은 그 연원 자체가 '서민들의 해방구'였다. 조선시대 육조(六曹)거리(지금의 세종로)가 정치적 중심지였다면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해 상가들이 집중된 종로는 한양(漢陽), 경성(京城) 서울에 걸쳐 상업 중심 지역이었다.

종로에는 늘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행렬로 붐볐지만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가 말을 타고 들어서면 일반 백성들은 일손을 멈춘 채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먹던 밥상도 물려야 했다고 한다.

어쩌다가 넋놓고 길을 가다가 "훠이~물렀거라!"라는 호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해 치도곤이 얻어 맞기도 했다. 양반들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던 백성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저항은 권력자들을 피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큰 길 대신 좁은 골목을 이용했다.

피맛골은 그런 연유로 생겨났다.

백성들은 '임금이나 사대부들이 탄 말(馬)을 피해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피맛(避馬)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길 양쪽으로 형성된 뒷골목 동네에는 피맛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이 생기고 사람들의 통행이 있으면 주막과 밥집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피맛골 안으로 서민들의 밥상과 술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래 피맛길은 지금의 교보빌딩 뒤에서 종로 6가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종로 1가에서 종로 3가까지만 그 모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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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집./사진=김영복연구가 제공
우제인씨가 창업자인 안덕인씨 부부로부터 '열차집'을 인수한 것은 1976년이었다.

당시 충남 청양 출신인 우제인씨는 남편과 함께 '열차집' 부근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안씨 부부는 우제인씨 부부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자녀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가업을 잇겠다는 이들이 없어 어차피 주변에서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던 안씨는 평소 성실하고 심성도 좋다고 여겨온 우제인씨 부부에게 "구멍가게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흔쾌히 가게를 물려주었다.

우제인씨는 창업자들과 2~3개월 동안 함께 일하며 빈대떡의 노하우를 집중적으로 전수했다.

일본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어느 재일교포의 요청으로 일본에 가서 20일 동안 머물면서 '빈대떡 노하후 전수 투어'를 한 적도 있다. 우제은씨는 맷돌과 녹두를 직접 가지고 가 그 교포가 운영하는 일본 곳곳의 15군데 지점을 돌면서 '열차집 빈대떡' 만드는 법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열차집'은 2009년 피맛골이 재개발 되면서 공평동 옛 제일은행 뒷 편 골목에 터를 잡았다.

이전 후 2년 정도는 매출이 줄어들었다. '젊음의 거리'였던 종각에 빈대떡은 낯선 음식이었고, 오랜 시간 발길을 끊었던 옛 단골들은 열차집이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씨 모자는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고기빈대떡, 김치빈대떡 등의 신메뉴를 추가해 기어이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열차집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2013년에는 서울시로부터 보존 가치가 있는 빈대떡 전문 식당으로 인정받아'열차집'은 인증번호 2013-184로 2013년「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빈대떡과 같은 부침개요리는 우리나라 말고도 세계 각지에 많이 있다. 중국 산동성의 지엔빙(煎)과 파전병이라 할 수 있는 청요핀(蔥油病), 일본의 오코노미야키(お好みき), 러시아의 블리니(blini), 영국과 미국의 팬케이크(Pancake), 이탈리아의 피자(pizza), 인도의 도사(Dosa)와 카르나타카 지방의 우타팜(Uttapam), 에티오피아의 인제라(Injera), 프랑스의 크레프(crepe), 멕시코의 토르티야(tortilla), 베트남의 반쎄오(Banh Xeo) 등이 각 나라의 부침개이다. 물론 나라마다 재료가 조금씩 다르고 요리 방식이나 먹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지만 이 다양한 부침개 요리들의 공통점은 서민과 애환을 같이 해온 음식이라는 점이다. 이들 음식의 대부분 각 나라의 길거리음식이다.

우리의 빈대떡 역시 암울했던 시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던 음식이었다.

이런 시대 상황을 잘 표현했던 대중가요가 바로 1943년 작곡가이며 가수였던 한복남(본명 : 한영순 1919~1991)의 '빈대떡 신사'였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리 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워인은 한가지 돈이 없어 들어갈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나올적엔 돈이없어 쩔쩔 내다가 뒷문으로 살금 살금 도망치다가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하하하하 우습다 호호호호 우습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우습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돈 한푼 없는 신사가 기생집에 가서 술을 먹고 나오다가 망신을 당하며 "돈 없으면 차라리 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조롱 섞인 풍자적 노래다.

조선 후기에는 절떡 대신 장안의 재상들이 빈대떡을 만들어 "아무개 대감의 적선(積善)이오!"하면서 기민(饑民)들에게 나눠 주는 적선떡(積善餠)을 돌렸다고 한다.-(九山스님) 증언-이러한 적선떡(積善餠)이 빈대떡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사대문안 양반들이 가난한 이들, 즉 빈자(貧者)를 위해 적선한 음식에서 유래돼 빈자떡이라 부르다가 빈대떡이 됐다는 설이 있다.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 1870~1933)는『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라는 요리책에서 빈대떡을 한자로 '빈자병(貧者餠)'이라며 가난한 사람의 음식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빈대떡'은 근거 없는 유래가 다양하다.

위와 같이 흉년이 들었을 때나 곤궁한 사람들이 거리에 넘칠 때 서울의 부자들이 큼지막하고 둥글 넙적한 떡을 만들어 빈자(貧者)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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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집 굴젓./사진=김영복연구가 제공
1670년(현종 11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가 쓴 조리서『음식디미방 (飮食旨味方)』에는 달은 철에 기름을 붓고 녹두가루 반죽을 부쳐 먹는 '빈쟈법'에서 유래했다고 했으며 1809년 (순조9년) 여성 실학자이자 서유구의 형수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가 쓴 『규합총서 (閨閤叢書)』 에도 음식디미방의 빈쟈법과 비슷한 요리인 '빙쟈'가 등장하는데 이쪽은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급요리이다. 그리고 두 조리법 모두 안에 꿀을 먹인 팥소나 밤소가 들어가는, 부침개라기보다는 전병이나 부꾸미 같은 후식류 요리였다.

이처럼 옛날 녹두가 귀한 시절에 손님 대접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내놨던 손님 접대용 음식이란 뜻의 '빈대(賓待) 떡'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설과 함께 서울의 정동(貞洞)에는 빈대가 많다고 하여 '빈대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 빈자떡 장수가 많아 '빈대떡'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호사가(好事家)들의 안주(按酒) 감 같은 설(說)은 될지언정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다.

1677(숙종 3)년 사역원 제조 권대웅(權大雄)은 역관(譯官) 변섬(邊暹), 박세화(朴世華) 등 12인이 편찬한 중국어 학습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빙져 병(餠)'이라는 해석이 등장한다.

그러나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는 조선 중기 중국어[漢語]와 이문(吏文)에 능통한 어문학자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이 1517년에 쓴『노박집람(老朴集覽)』을 기초한 것이다.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와 비슷한 시기인 1682년(숙종 8) 민정중(閔鼎重 1628년 ~1692년)이 사역원 중국어 역관인 신이행(愼以行), 김경준(金敬俊), 김지남(金指南)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고 중국인 문가상(文可尙), 정선갑(鄭先甲) 등의 수정을 받아 1690년에 사역원의 정창주(鄭昌周), 윤지흥(尹之興), 조득현(趙得賢)으로 하여금 2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게 한 중국어 어휘사전인『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빙쟈'로 나온다. '빙쟈'는 '빙져'의 제2음절 모음이 음성모음에서 양성모음으로 바뀐 어형이다.

이'빙져 餠'에 대해 조선 중기 문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영의정 및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588년(선조 21)부터 시작해 1590년(선조 23) 3월 11일까지 기록되어 있는 치병일지인『정청일기(政廳日記)』에 1588년 9월 24일 오후에는 떡 종류가 많았는데, 그중에 빈자병(彬煮餠)이 보인다.

그렇다면 '빙져 餠'을 한문으로'彬煮餠'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1760년부터 1910년까지 151년간의 국정 운영 내용을 국왕의 시각에서 매일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일성록(日省錄)』이 있다.

이 일성록(日省錄)에 정조(正祖) 19년 (1795) 1월 21일 자전(慈殿)·자궁(慈宮)·내전(內殿)이 궁(宮)의 대문으로 들어가 연(輦)에서 내려 재실로 들어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할 때, 신위 앞에 올린 제물(祭物) 중 떡의 종류 가운데 빈자(彬煮)가 보인다.

1897)에 '빈쟈',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필사본(김민수 편, 『주시경(周時經傳書)』, 권 5, 662면)에 '빈자'이 보인다. '빙쟈' 아닌 '빙자', '빈쟈', '빈자'라 표기된 사실과 '떡'이 붙은 사실이 눈길을 끈다. '빙쟈'의 정체성(正體性)이 모호해져서 그것을 보강하기 위해 '떡'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897년 게일(Gale, J.S.)이 한국어를 영어로 풀이한『한영자전』에는'빈쟈떡'으로 나타난다.

구한말 문신이자 의료인이며 한글학자인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 1909년에 쓴『자전석요(字典釋要)』와 구한말 교육자 청람(靑嵐) 문세영(文世榮 1895~1952)이 1920년에 편찬한『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등에도'빈자떡'으로 나온다.

그러나 1938년 편찬한『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에는'빈자'보다'빈대떡'이 등장하는 빈도수가 더 높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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