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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미사경정공원 열린 88 run 마라톤 3500명 참가자 (사진=경륜경정총괄본부 제공) |
투표 결과는 서울 52표, 일본 나고야 27표였다. 당시 현지에서는 나고야가 앞선다는 관측이 적지 않았던 만큼 서울의 승리는 예상 밖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서울올림픽 유치 움직임은 그보다 앞선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1978년 태릉국제사격장에서 열린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운 계기가 됐고, 대한체육회는 올림픽 유치 가능성과 타당성을 검토해 정부에 건의안을 제출했다.
당시에는 유치를 둘러싼 찬반 논란도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추진체계가 만들어지면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79년 10월 8일 박영수 당시 서울시장이 서울 유치 방침을 공식 발표하면서 움직임은 공개적인 유치전으로 전환됐다. 이후 1981년 2월 24일 서울시는 IOC에 유치 신청 서류를 제출했고, 정부와 체육계는 IOC 관계자 조사와 각국 IOC 위원을 상대로 한 교섭에 나섰다.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부 유치추진위원회와 실무대책반도 가동됐다.
결국 바덴바덴에서 승부가 갈렸다. 체육계뿐 아니라 정부와 경제계 인사 등이 참여한 대표단이 현지에서 표 확보에 나섰고, 국가기록원 자료에는 당시 유치 활동과 IOC 위원들의 지지도 변화를 분석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렇게 국민의 기대 속에서 출발한 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다. 올림픽은 160개국, 1만330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는 대회로 치러졌고, 동서 진영의 선수들이 함께하는 국제 스포츠 무대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38년이 지난 2026년, 올림픽의 기억은 다시 달리기로 이어졌다. 12일 하남 미사 경정 공원에서 열린 '88 RUN'에는 350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5㎞와 10㎞ 코스를 달리며 서울올림픽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을 직접 걸었다가 아닌, 직접 달리는 방식으로 경험했다.
미사경정공원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조정·카누 경기가 열렸던 곳이다. 한때 세계 선수들이 메달을 놓고 경쟁했던 경기장이 이제는 시민의 생활체육 공간이 된 셈이다.
행사의 메시지는 세대 계승으로 이어졌다. 하형주 이사장과 생애 첫 마라톤에 나선 어린이, 하남시 스포츠 꿈나무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을 차례로 전달했다. 과거의 올림픽을 기억하는 세대와 앞으로 스포츠 무대를 꿈꾸는 세대를 하나의 성화봉으로 연결한 것이다.
올림픽 유산의 의미는 지역 체육 지원으로도 확장됐다. 경륜경정총괄본부는 하남시 육상 꿈나무들의 성장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3760만원을 전달했다.
1981년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을 열 수 있느냐를 놓고 국가적 도전이 시작됐다. 1988년에는 세계인이 서울로 모였고, 2026년에는 시민 3500여 명이 그 역사가 남은 공간에서 다시 출발선을 밟았다.
올림픽의 유산이란 경기장이나 성화봉 같은 물리적 흔적만을 뜻하지 않는다. 과거의 국가적 도전을 오늘의 시민 참여와 미래세대의 스포츠 기회로 연결할 때, 45년 전의 유치 열망도 현재형의 가치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남=이인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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