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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정회고록) “남기고 싶은 이야기”(35회) 선비정신의 전형, 김대길 前 충남도 자치행정국장(상)

김 용 교
前 충남도정책기획관
前 아산시 부 시 장

한성일 기자

한성일 기자

  • 승인 2026-09-15 09:45

신문게재 2026-09-16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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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길 전 충남도 자치행정국장은 대천시 부시장.부여군 부군수.금산군 부군수를 역임하였다. 사진 제공=김용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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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용 교
前 충남도정책기획관
前 아산시 부 시 장
(1) 선비정신의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1988년 관선 충남지사로 취임한 심대평 지사는 ‘정신문화’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심 지사는 충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도지사로 취임하기 전에는 대전시장을 두 차례 역임하면서 특히, 충효정신, 충절의 고장 충남, 충청도 양반 등 충남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신에 대해 오랜 기간 생각을 가다듬은 듯하였다.

심 지사는 청와대에서 행정관과 비서관, 행정수석으로 세 차례 근무하였는데 행정관 때는 고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면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성남 분당에 위치한 한국학 중앙연구원) 설립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건전한 정신문화가 받쳐 주어 이 둘이 양립되어야 건강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극도의 가난을 극복하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육체의 건강 못지않게 정신건강의 중요성도 크게 인식한듯하다.



사계 전문가와 대학교수들로 하여금 충남 정신의 뿌리와 실체를 밝히기 위해 연구용역을 발주하였다. 이 연구에서 충남정신의 실체를 충효정신, 절의정신, 선비정신, 예의정신, 개척정신 등 다섯 가지 정신으로 정립시켰다.

절의정신에서 절의(節義)는 현실의 위압이나 유혹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굽히지 않는 내면의 투쟁이요, 불의(不義)에는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정신이다. 충남에 의인(義人), 열사(烈士). 의사(義士)가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도 절의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의리(義理)는 한국인에게 전통적 도덕 가치로 인간관계의 규범의식 속에 깊이 젖어 있다. 물질적 이익추구나 신체적 욕망에 예속되는 것을 결벽증이라 할 만큼 거부한다. 여기서 선비는 청빈의 삶을 중요 가치로 인식하고 선비정신의 핵심을 의리(義理)에 두고 있다.



선비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격으로 그 지성도 모범적 행동의 실천력을 지녀야 한다. 선비는 관료(벼슬)로서 지위를 갖게 될 때 신분 계급이 아니라 덕망에 의해서 대중의 존경을 받는 것을 선비의 조건으로 하였다.

여기서 절개와 의리를 합친 절의정신과 의리를 핵심으로 하는 선비정신을 나눈 이유는 무엇일까? 절의정신은 그 의(義 : 올바름)를 목숨을 바치며까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요, 선비정신의 의(義)는 인간으로서 도리를 꿋꿋이 지켜나가는 정신이라고 볼 때 충남에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인물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만 놓고 보아도 워낙 많다 보니 절의정신을 구분 독립시킨 것으로 나는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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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길 국장의 아호는 유성농부다. 약칭으로 유농을 자주 쓴다. 사진 제공=김용교
(2) 김대길(金大吉)은 삶에서 일관되게 의리(義理)를 주장하였다

나는 행정 6급 주무관 때인 1987.6.1 충남도청 지방과 여론계에 배치되었다. 당시 여론계장은 김대길 사무관이었고 김 계장은 후에 지방과 지도·조직관리·행정계장을 거쳐 도의회 전문위원, 공보관, 대천시 부시장, 부여 부군수, 금산 부군수를 거쳐 충남도 자치행정국장을 역임하였다.

내가 여론계에 배치받고 보니 5공화국 정권의 대통령 7년 단임·간선제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1987.4.13 호헌선언에 저항하는 운동이 한층 가열되고 있을 때였다. 호헌 철폐를 외치는 시위 행렬은 서울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만 명이 넘게 동참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충남도청이 소재한 대전에서도 충남대 등 대전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연일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면서, 민정당 충남도당 사무실에 화염병을 던져 큰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여론계 직원들은 경찰국 정보과 형사들과 한팀을 이루어 정보를 공유하며 현장취재 기자가 되었고 김대길 계장은 데스크 역할을 맡았다. 취합된 여론 동향은 김대길 계장 손에서 정리 편집되어 실국장들에게 전파하고 부지사, 도지사, 내무부에 동시 보고되었다.

대다수의 심층 여론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주의를 살려내자"는 것이었다. 김대길 계장은 추호도 얼버무림이 없었다. "앞으로 안정을 되찾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등의 마음에도 없는 아부성, 왜곡된 미사여구의 여론 동향 표현은 어림도 없었다.

여론 동향 팩트 그대로를 도지사와 내무부에 보고하였다.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도청 일개 계장의 그 같은 펜대 움직임은 큰 용기와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한양수 지사께서는 밤 12시쯤 퇴청하여 오전 6시경 출근하여 밤사이 동향을 살펴보았다. 노규래 지방과장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고 아침 도지사께 상황 보고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에 잠깐 들르는 정도였다. 우리들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오전 10시경부터 시위가 시작되면 새벽 3~4시까지 계속되었다. 긴박하게 움직였고 이 같은 상황은 6.29 선언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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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우리나라 선비들은 시.서.화를 두루 갖추었다 . 김대길 국장은 정년퇴직후 충남대 미술대 교수로부터 사사를 받기도 하였다. 사진 제공=김용교
(3) 김대길은 개인의 명예보다 의(義)를 선택하였다

김대길은 지방과 계장을 두루 거친 후 지방서기관으로 승진하여 도의회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청 감사담당관 자리가 공석이 되자 당시 홍선기 지사는 김대길을 감사담당관으로 앉히는 것이 여러모로 적재적소라 판단하고 전보인사 방침을 세웠다.

홍 지사는 도청 지방과장으로 재직할 때 김대길은 지방과 행정계 주무관으로 근무한바 있어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다. 당시 인사 패턴을 보면 감사담당관으로 옮기게 될 때 지방과장 등 요직과장을 한 번 더 거친 후 임명직 군수로 나갈수 있는 기회였다. 그만큼 전보는 곧 영전이었다. 그러나 영전의 길을 거절하였다.

그 이유가 의(義)와 의리(義理)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과장과 계장은 상하 관계다. 그러나 그 당시 도청 과장과 계장의 계급구조는 매우 불합리하였다.

도청 과장은 5급 국가사무관이요, 도청 계장은 5급 지방 사무관이었다. 제복 입은 공직자라면 동일 계급장을 달고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격이었다. 왜 그 같은 계급구조였을까? 권위주의 시대 내무부의 시도 장악에 관련된 문제였다.

시도 과장들의 경우, 같은 계급의 사무관인 내무부 계장들이 컨트롤하고 있었다. 시도 과장들을 4급 서기관으로 보임할 경우 내무부 계장들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하락하면서 내무부 과장과 시도 과장이 계급상 대등한 관계가 되다 보니 내무부 입장에서 양해될 수 있는 사안이 못 되었다.

상위의 중앙정부가 하위인 지방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중앙집권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도의회 전문위원의 경우, 밑에 3-4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조직이지만 지방 자치 시대 개막과 더불어 지방 4급 서기관으로 보임하도록 내무부의 배려가 있었다.

4급 김대길 전문위원이 5급 감사담당관으로 전보될 경우 한 직급 강등에 따른 당사자 동의가 있어야 했다. 김대길 전문위원은 홍 지사의 영전 배려 인사를 마다하고 전보인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것이다. 계급 강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셨던 상사, 현재도 상사인 도지사의 뜻을 거스른다는 인간적인 미안한 마음, 그러나 "내가 영전의 길을 택하고 혼자 빠져나왔을 때 남아있는 동료 전문위원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어 전보 인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훗날 술회한 바가 있다.

그 당시 감사담당관 전보를 수락하였더라면 그 후에 군수 발령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김대길은 자신의 명예보다 의리를 택하였던 것이다.

김대길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출발과 끝은 항상 올바름(義)에 있다. 의(義)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나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 김대길 선배에게 말을 건넨 것이 결코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는 거짓말로 인식되게 한 적이 있다.

얼마나 화가 나셨던지 그 뒤로 만날 때 찬 바람이 휙휙 몰아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의에 어긋나면 무언(無言)의 추궁이 서릿발 같기도 하였다.

김 용 교(前 충남도정책기획관/前 아산시 부 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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