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체격이 남달리 크고 매우 씩씩하며 대담하여 이름을 "담덕(談德)"이라고 했다. 담덕은 열두 살 때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고국양왕이 임금이 된 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정하니 "영락대왕"이라 부른다.
왕이 되던 해 7월에 남쪽에 있는 백제와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그동안 여러 차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투에서 임금이 되면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백제 땅 십여 곳을 함락시켜 정벌하고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관미성(강화 교동도)을 이십여 일만에 함락시키고 미수성(지금의 인천)도 함락시키고 한강 남쪽까지 진격하여 모두 58개의 성과 700여 마을을 함락하고 백제의 임금 아신왕으로부터 백제는 영원이 고구려의 신하국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는 대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백제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세력만회를 위하여 399년에 일본(倭)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연결되어있는 신라를 침공하였으며 404년에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공격해 왔으나 광개토왕은 5만의 병력을 보내 신라군을 몰아내는 것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여 대방고지에 침입하였던 왜적(일본군)들도 궤멸시켰다.
광개토왕은 407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여섯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응징하였는데 "광개토왕릉비"에는 407년 전투의 상대국이 마멸되어 어떤 학자는 연 나라 와의 전투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백제와의 전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옳다.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는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니 신라는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맺게 되었고 고구려는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신라에 복속의 담보물로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게 했으며 400년경에 일본 왜구의 신라 침략을 고구려가 막아줌으로서 더욱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고구려의 서쪽에는 후연(後燕)국이 있었는데 후연의 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공격해오자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광개토왕은 보복전을 감행하여 402년에 요하를 건너 후연 땅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많은 전과를 올렸고 요동성을 비롯하여 요하 여러 지역을 고구려 땅으로 하였다.
405년과 406년에도 후연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 일대를 침공해 왔으나 광개토왕은 용동성과 목저 성 전투에서도 크게 이겨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한편 광개토왕은 산둥 성에 중심을 둔 남연의 왕 모용초(慕容超)에게는 명마를 선물 하는 등 유화책으로 후연을 견제하였으나 408년에 후연을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북연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신장해 나갔다.
광개토왕은 북으로는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오백여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포로로 잡혀있던 고구려백성 일만 여명을 되찾아 고구려로 데리고 왔으며 거란의 일부 인 비려(碑麗)를 공략하여 염수방면의 육칠백 여개 마을을 격파하고 많은 전유물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410년에는 동부여(東扶餘)를 침공하여 굴복시킴으로서 광개토왕은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와 세력권을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정력적으로 왕성한 국토확장으로 광개토왕이 고구려의 왕으로 집권한 후에 무려 64개의 성과 1400 여개의 마을을 공파하여 고구려로 귀속시켰으니 고구려의 영역은 크게 팽창하여 서쪽으로는 요하에 까지 이르렀고 북으로는 개원과 영안 에까지이고, 동으로는 옥저와 옥예 훈춘까지 이르렀고 남으로는 임진강 한강유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 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개편하여 재정비를 단행하고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중흥에도 기여하였다.
광개토왕의 이러한 노력과 성과로 다음 대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평양천도의 발판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영토로 만들었던 광개토왕은 "광개토경" 또는 "광개토지"라는 호를 얻었으며 고구려는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북반부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고구려 역대 선왕들의 남진정책을 계승하여 백제를 완전히 제압하고 낙랑 땅과 대방의 옛 땅도 다시 찾아 확보하였다.
광개토왕은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으니 "클 거(巨)"자와 "이을 련(連)"자로 큰 나라를 이어간다는 뜻의 이름인데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413년부터 491년까지 무려 78년을 고구려의 왕으로 집권하면서 98세까지 장수한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이 거련(巨連)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국토를 가장 넓게 확장하고 국가를 튼튼하게 강대국으로 우뚝 세운 광개토왕은 젊고도 젊은 나이 39세를 일기로 412년에 세상을 떠나니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공적을 기념하여 414년에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여 세워서 오늘에 전하니 만주 땅 지금의 압록강중류의 만포진(滿浦鎭)에서 마주보이는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의 현청 소재지인 통구성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4,5km 지점에 있다.
지나온 우리의 역사 속에 이름 하나 하나마다 이름의 뜻이나 이름에 담겨있는 동양철학적 운기가 깊이 함축되어 있기에 참으로 이름을 짓는 것은 아무나 가볍게 함부로 이름을 지어서는 안되며 더욱 신중하게 더 깊은 학문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름 속에는 개인의 운기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운과도 깊은 연관이 있고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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