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만약에

[만약에] 50화. 볼펜 없었다면 기억도 증발했다

볼펜이 이뤄준 작가의 꿈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6-08 00:00
평소 필자는 두 가지의 삶에 매진하고 있다. 하나는 당연히 생업인 경비원의 직업에 열중한다. 주근에 이어 야근을 이틀 연속 한다. 이어 쉬는 날이 도래한다. 그렇다고 해서 편히 쉴 수는 없다는 현실적 구속력이 발목을 잡는다.

이는 글을 쓰고 때론 취재까지 나가야 하는 때문이다. 취재를 하자면 볼펜과 수첩은 필수다. 스마트폰에 메모 기능이 있긴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인 양 여전히 불편하다. 아무튼 볼펜으로 인터뷰이(interviewee)의 인적사항과 기타 취재에 필요한 주변의 상황 등을 스케치 하노라면 새삼 볼펜의 우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볼펜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만년필이 1884년에 미국의 보험 외판원 루이스 에디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그 만년필 시대를 지나 볼펜의 첫 역사를 연 인물은 헝가리의 라디슬라스 비로(Ladislas Biro, 1899~1985)와 게오르그(Georg) 형제로 알려져 있다.



형인 비로는 조각가이자 화가였으며,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는 매일 많은 양의 글을 써야 했다. 그런데 만년필로 그 일을 하기에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취재나 교정 도중 만년필의 잉크가 말라버려서 잉크를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론 날카로운 펜촉으로 종이가 찢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을 위한 원고의 교정을 보던 비로는 '잉크를 보충해 주지 않아도 되고, 종이도 찢어지지 않는 필기구를 만들어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화학자이던 동생 게오르그에게 끈적거리는 잉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죽이 맞은 형제는 그날부터 새로운 필기구 발명에 몰두했다. 1938년 그들은 몇 번의 실패 끝에 볼베어링을 통해 특수잉크가 나오도록 하는 현대식 볼펜을 발명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하지만 헝가리에서 특허는 받았으나 잉크를 녹이는 기름을 찾지 못해 생산에는 실패했다. 결국 이들은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영국인 헨리 마틴의 후원으로 1943년에 특허를 획득하고 'Birom'이라는 브랜드로 볼펜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은 잉크가 새는 피스톤식의 볼펜을 튜브 식으로 바꾸는 등 품질을 개선하였다. 볼펜은 영국 공군에 처음 지급되었는데, 고도에서도 잉크가 새지 않아 큰 호응을 얻었다. 비로의 볼펜은 출시되자마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미국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미국에는 밀턴 레이놀즈에 의해 알려졌는데,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던 중 비로의 볼펜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잉크를 내보내는 시스템을 개량한 볼펜을 만들었고 미국 정부는 레이놀즈의 볼펜 10만 개를 구입해 군인들에게 지급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인 화학자 프란츠 제이크는 찰기가 있는 잉크 개발에 성공해 '물속에서도 쓸 수 있는 펜'이라는 광고로 히트했다. 볼펜은 볼포인트 펜(ballpoint pen)의 약자(略字)이다.

가격이 여전히 저렴하고 비단 문구점이 아니라도 편의점과 슈퍼마켓 등에서도 팔고 있어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도입 초기 기자들이 주로 사용하여 '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모나미
한편 우리나라에 볼펜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 들어온 미군에 의해서였다. 이후 1963년 들어 국내 생산이 시작되었고, 60년대 말부터 대중 필기구로 정착되었다. 예나 지금 역시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모나미 볼펜에는 '모나미 153'이란 숫자가 표기돼 있다.

이는 1963년 5월 1일, 국내 최초로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이 출시되면서부터의 어떤 부동의 브랜드인 셈이다. 프랑스어로 '내 친구'라는 뜻의 '모나미'와 15원에 출시된 세 번째 제품이라는 뜻의 '153'을 합친 게 바로 '모나미 153'라고 한다.

이 세상의 사물엔 장점과 단점이 양면성으로 존재한다. 이에 걸맞게(?) 볼펜의 단점은 쓸 수는 있지만 지우개처럼 지워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볼펜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지워지지 않는 걸 의식하여 더욱 또렷이 쓰고 볼 일이지 싶다.

그제 오후엔 야근을 들어가기 전 요즘 베스트셀러인 책 <태영호 증언 - 3층 서기실의 암호>를 한 권 샀다. 신문에서 보니 그 책이 어느새 10만 권 이상이나 팔렸다고 한다. 요즘 같은 출판가의 지독한 불황에 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아~ 부럽다! 나는 언제쯤 그런 영광의 무대에 등극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한 권에 2만 원이니 저자는 아마도 인세로 권 당 2천 원은 받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렇다면 10만 권에 대한 인세는 무려 2억 원이 되는 셈이다!

때문에 필자 또한 궁극적으로는 다시금 책을 발간코자 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나아가 책까지 발간하는 작업엔 '정년퇴직'이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야근을 하면서 늘 그렇게 습관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글은 주로 컴퓨터의 한글과 컴퓨터 사양을 이용하여 자판을 두들겨 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볼펜의 조력(助力)은 당연하다. '못난 몽당연필이 천재의 머리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볼펜을 이용한 메모는 기자와 작가의 기본인 까닭이다.

사람의 과거는 봄날처럼 빛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만 있을 수 없다. 때론 구질구질한 장마철인 양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이실직고하지만 지난 날 비운(悲運)의 소년가장 시절엔 호두과자와 음료 외 볼펜도 팔았다.

"껌과 볼펜 중 하나라도 사 주세요."라는 나의 간절한 바람을 그러나 시외버스정류장의 버스 안에서 발차를 기다리던 승객들은 대부분 엄동설한처럼 차갑게 외면했다. 그러다가 가뭄의 콩 나듯 볼펜도 받지 않고 당시로선 거액이었던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선뜻 주시는 '천사 같은' 손님도 없지 않았다.

그런 날엔 점심을 싸구려 국수가 아니라 제법 포실한 국밥 등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었기에 나로선 그날이 바로 '화양연화'였던 셈이다. 세월은 여류하여 아들과 딸이 모두 결혼했다.

자식농사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며 주변에서 부러워하니 이만하면 허투루 산 인생은 아니지 싶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거기에 치열한 독학으로 마침내는 기자와 작가까지 되었으니 조금은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을 성 싶다.

이렇게 되기까지엔 기록을 담보로 한 볼펜의 힘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만약에 볼펜이 없었다면 지난 시절의 그 숱한 기억도 덩달아 증발했을 것이었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홍경석-인물-210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