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수저’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제가 만든 용어입니다(하하하). 저는 베이비붐 세대에 가난한 집안의 7남매 중 아들 중엔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어머니가 딸만 낳는다고 쫓겨나실 뻔 하다가 제가 아들로 태어나 이쁨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고생하셨죠. 배우고 싶어도 학교를 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후 동구 중동에 있는 건재한약방에 갔는데 일을 해도 급여가 없었습니다. 명절에 고기 사주고, 옷 한 벌 사서 집에 보내줬습니다. 어머니가 시골에서 남의 집 밭일을 하셨는데요. 어머니가 밭고랑에 앉아 일을 하시다가 학교 가는 친구들을 보면 남몰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불교의 경을 읽으시며 묘자리를 봐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공부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야간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유명한 권투선수였던 염동균 선수와 홍수환 선수를 보면서 배고픈 사람이 유명해지는 방법은 운동밖에 없다는 생각에 태권도를 배우게 됐죠. 제 신체조건으로 봐서 운동에 소질이 있겠다 싶어 그 당시 체육으로 최고였던 인천체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인천체육전문대학 무도과를 졸업했는데요. 백선엽 장군이 만든 이 대학에서 벽돌을 들어 나르며 저절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셈입니다. 제가 6회 졸업생인데 졸업하고 방위로 군대 다녀온 뒤 지역사회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충남 대표선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말레이시아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으로 다녀왔습니다. 체육청소년부 초청으로 태권도를 가르치며 일하는 곳으로 가게 된 거죠. 제가 그 당시 뼈만 있고 키가 홀쭉 커서 태권도 하기에 좋은 체격이었습니다.
▲1981년부터 82년까지는 말레이시아 공과대학 기능훈련소에서 청소년들에게 체육과 태권도 교육을 통해 한국의 얼을 심어주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지도자 생활을 하던 중 태권도의 세계 총본산인 국기원의 추천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의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단원으로 파견되어 서아프리카 내륙국가인 부르키나파소에 가게 된 거죠. 부르키나파소에서는 국가 대표 선수를 지도해 90년 이집트 아프리카 게임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상위 입상하는 등 태권도 체육 지도 활동을 통해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기여했습니다. 부루키나파소는 북한과 형제국가였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과 우호적 외교관계를 확립하는데 기여했죠. 큰 보람이었습니다.
처음 부르키나파소에 갈 당시에는 당시 비행기에서 딱 내리니 대사관에서 대한민국 외교관 3등 서기관이 마중을 나왔는데 동남아 사람 같았습니다. 기후는 한증막처럼 덥고, 여기서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기관을 따라 정착을 했는데 그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라 북한과 친형제같이 지내더군요. 정치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곳에 가서 운동을 가르치게 된 거죠. 대통령 경호원들과 경찰학교, 헌병사령부, 국군체육부대, 우와가두구 국립대학에서 운동 지도를 하게 됐습니다. 이 나라 경호실은 특히나 북한과 가까운데 군 훈련 때 북한의 태권도 격술을 배우고 있더군요. 우리나라는 88올림픽 이후 격술이 태권도로 바뀌었는데요. 군 훈련 때 태권도 격술로 훈련받던 군인들에게 우리나라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으니 북한 사범은 제가 눈에 가시였겠죠. 북한은 태권도 사범 1명과 통역관 1명, 기사 1명 등이 3인 1조가 되어 다니더군요. 북한 태권도는 우리나라 최홍희 장군이 북한에 가서 전파한 ITF 태권도라고 부릅니다. 김운용 총재가 정식 올림픽종목으로 만든게 우리나라 월드 태권도입니다. ITF 태권도는 옛날 무도태권도로 절도와 파워를 강조하죠. 북한은 태권도 가르칠 때 책이나 자료를 많이 나눠줍니다. 아프리카 친구들은 받는데 익숙해 호기심에 북한 태권도에 몰렸지만 1년 지난 후 문 닫고, 저는 지속적으로 태권도관을 유지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지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최선을 다했죠. 북한은 3명, 우리는 저 혼자니 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친구들에게 밀리면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무척 외롭고 힘든 시기였죠. 북한과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 겁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도 주고, 가수들 노래 테이프도 주고, 통일이 되면 만나자고 하며 인간적으로 잘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6년 동안 부르키나파소에 있다가 80년 여름휴가를 맞아 그리운 고국으로 잠시 다녀왔는데 휴가 마치고 가보니 국군체육부대에서 제가 맡고 있던 태권도 교육을 북한군 태권도 사범이 하고 있더군요. 운동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북한태권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나의 지도를 받고 싶다면 다시 와서 지도를 해 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경찰학교에 가서도 똑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북한이나 일본사람들보다 활동을 많이 하면서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들은 저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태권도 시범 보이는 모습이 방송에 노출되면 저의 격파술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서 다가와 실제 사람 손이 맞냐고 만져봅니다. 태권도 시범 행사가 끝나면 팬 사인회를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거의 한류스타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하하하). 어딜 가도 영웅 스타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부르키나파소가 북한과 가까운 나라임에도 저의 태권도 외교가 민간외교관 역할을 해냈습니다. 대통령이 됐든 장관이 됐든 누구든 만날 수 있었죠. 우리나라 정부와 부르키나파소 사이에서 중매쟁이 역할을 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대통령이 이 곳에 다녀간 뒤로 여러 국내외 정황상 이 곳 대사관이 폐쇄되게 됐고 북한은 우리가 기회주의자인 것처럼 선전해 외교가 단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그레망을 받고 입국해야 되는데 그 물꼬를 제가 텄습니다. 양국의 외교가 단절될 위기에 처했을 때 원상회복시킨 점이 보람이 큽니다.
아이들은 이때 당시 아메리칸 인터네셔널 스쿨을 다녔는데 미국 대사관의 미 헌병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고 좋은 유대관계를 맺었죠. 미국 교민 사교 단체와 어울려 운동도 하고 미국팀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이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미국 친구들이 저를 ‘마스터 김’(불어로는 ‘메트로 김’)이라고 불렀는데 제가 공항의 비행기 트랙 안에서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며 검색도 없이 다니는 것을 보고 ‘마스터 김은 여기서 마약밀매해도 되겠다’고 농담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워낙 어려운 지역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정부는 부르키나파소보다 상황이 좋은 카메룬으로 보내준다고 했는데 저는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한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한국교민들 6명이 주말에 극장에 갔다가 사회주의 국가는 중간에 표 검사하는 것을 모르고 표를 버렸다가 헌병들에게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6명의 교민들을 위해 제가 한국문화를 설명해주고 이해를 시킨 뒤 구해낸 적이 있습니다. 다들 저를 영웅시하더군요(하하하).
제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정신이 남달리 깊은 편입니다(하하하).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죠. 부르키나파소 국경을 통과할 때 불어로 메트로 김이나 영어로 마스터 김을 보러간다고 하면 무사통과될 정도로 저의 위상이 높았고 인기도 많았지요(하하하). 부르키나파소에서 메트로 김은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매년 제자들이 저를 찾아오는데요. 부르키나파소에서도 오고, 네덜란드에서도 오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제자들이 저를 만나러 옵니다. 아프리카의 외국인학교 체육교사 제자는 한국에 오면 2개월씩 머무르다가 갔습니다. 프랑스에 망명한 제자도 매년 교육을 받으러 옵니다. 미국에 가 있는 제자도 태권도 교육을 받으러 오면 두 달 씩 체류하고 가는데 제가 고향인 대청호 주변에 시골집을 지어놓은 것도 이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제 본적지가 동구 오동이다 보니 본적지에 집을 짓고 친구들과 제자들을 초청해 머물다 가게 하는 거죠. 아프리카에서 영웅 호칭을 들었던 만큼 평생 이 친구들과의 우정과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삽니다. 말보다는 마음으로 대화하는 거죠. 어떤 분야의 최고가 되려면 철학이 깃들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태권도에도 철학이 담겨있어야죠. 입술의 대화가 아닌 마음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제가 부르키나파소에 있을 당시 그 나라 경호를 책임지는 경호원들을 교육시키다 보니 아무리 더워도 의전을 위해 옷을 바르게 다려 입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옷은 항상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으려고 노력하지요. 옷을 잘 입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저를 만나는 상대방을 위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대전을 찾아오는 수련생들에게 짧게는 1주에서 길게는 수 개월간 태권도 지도를 매년 해왔고, 태권도를 통해 세계 속의 대전을 전파해왔습니다. 미국 보스톤, 이탈리아,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룩셈부르크, 부르키나파소,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수련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태권도 스승님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매우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이게 바로 민간외교죠(하하하).
▲유성구청과 대전시체육회에 태권도 실업팀을 창단해 대전시의 명예를 드높였고, 이 지역 출신 엘리트 선수들에 대한 진로 확충과 해외 선수들의 전지훈련을 유도해 지역경제에 효과를 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대전시에 태권도 상설 시범단을 창단해 연 40회 공연으로 대전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구도심 활성화와 관광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2009년과 2010년엔 전국소년체전 대전시 태권도부 총감독으로서 2년 연속 금메달 3개를 따내 지역 체육인의 긍지를 드높였습니다.
국군간호사관학교에서 태권도 강사를 할 당시에는 입교한 간호장교 후보생들에게 10여 년간 태권도 지도를 통해 전 생도를 유단자화하고 인성 교육을 시켰습니다.
대덕대학 경찰행정학부 겸임교수 시절에는 경찰행정학과와 군사학과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해 인성교육과 더불어 태권도 유단자를 배출했습니다. 또 충남대와 목원대에서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태권도를 통한 인성교육과 태권도 보급과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
시민건강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시민과 아침동행을 했고, 장애인 스포츠 실업팀을 창단했고, 장애인 전용 체육관 건립을 위해 국비 50억 원을 확보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예, 인천체대 졸업 후 목원대 사회체육학과에서 ‘태권도 관광상품화 방안’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고요. 충남대 체육대학원에서 ‘세계 태권도 아카데미 지도자의 조직공정성과 조직 시민 행동의 관계’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조직의 충성도가 애국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죠.
대전 태권도협회 전무이사 시절에는 관장들에게 소양 교육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대전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시절에는 아프리카 대회에 나가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예, 그때 당시 대전사랑시민협의회장님이시던 정교순 법무법인 유엔아이 대표변호사님과 함께 라디엔티어링대회와 교통질서 확립 캠페인, 다문화여성 전통예절지도와 타종 행사 , 먹거리부스 운영 등을 통해 대전문화 활성화에 힘썼죠. 대전시민들과 안보현장체험, 범시민 태극기 달기 운동 캠페인, 대전시민의 날 행사, 여성정치 의식 함양교육, 나눔문화 시민토론회 등을 개최해 대전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전NGO 축제와 시민단체 어울림마당 등을 통해 시민단체 활성화에 힘썼고요. 대덕특구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랑의 떡국과 밑반찬 나눔, 연탄나눔, 차없는 코미디 공연 개최 등 대전경제살리기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메르스 사태 극복과 선거구 증설 서명 운동 등 시민역량 결집에도 힘썼지요. 재난안전 확립 추진사업과 교통질서 확립 캠페인, 안전문화운동 전개 등 안전의식 확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서아프리카 태권도 교육과 지도, 태권도 실업팀 창단을 비롯해 시민과 아침동행 등 태권도 활성화와 시민건강 증진에 기여했습니다.
시민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지역사랑 운동에 참여하는 분위기 조성에 힘썼고, 시민 애향심 고취에 기여하고, 태권도 지도를 통해 지역의 명예와 국위를 선양하는 등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90년 창립했고 서구 월평로 13번길 60 에이스타운에 본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천안 동남구 풍세로와 세종 조치원읍 충현로에도 회사가 있지요. 여성기업 인증업체이고, 다수의 센서 노드를 이용한 열선동체센서 특허보유업체입니다. 시설경비업과 위생관리업, 주택관리업 허가를 받았고, 경비원 신임교육 위탁업체에 선정됐지요. 기계경비업 허가도 받았고, 소독업 신고를 했고, 정보통신공사 사업 등록 후 대청기업(주)에서 대청보안(주)로 상호를 변경했습니다. 사업자 등록증과 소독업 신고증, 위생관리용역 영업신고증, 정보통신공사업등록증, 기계경비 허가증, 한국경비협회 회원증을 갖고 있습니다. 45명의 직원들이 시설경비와 인력경비, 정보통신공사업, 보안시스템장비 제조업, 기계경비업, 소프트웨어개발, 청소와 소독업을 통합관리시스템에 의해 기계경비, 시설관리, 정보통신, CCTV 사업을 하는거죠. 30여 년 이상 책임과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 중심의 서비스 제공을 통해 고객 만족과 사회 안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는 사회공헌활동도 하고 있는데요. 매주 1회 취약계층에게 사랑의 도시락 배달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도시락 조리 보조 봉사활동도 하고요. 사랑의 김장나누기 김치담그기와 김장 배달 봉사활동도 하고 있지요. 금촌 주야간 단기보호센터에서 자원봉사활동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 토종기업인 저희 ACE 대청보안 주식회사는 고객 여러분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깊이 각인하여 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전 요원들이 365일 24시간 항상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드릴 것을 약속 드립니다. 고객의 신뢰와 사랑 속에서 범죄 없는 우리 사회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첨단 무인 경비 사업을 하는데요. 인력경비, 무인경비시스템, CCTV 시스템의 통합보안솔루션입니다. 무인경비가 시설물 내부를 감시하고, CCTV 가 시설물 내부와 외부를 감시하고, 상황실은 침입 신호 발생시 상황실 근무자 영상을 확인합니다. 출동대원은 경찰과 연계해 현장에 긴급 출동해 범행 현장을 처리합니다.
CCTV 는 500만 화소 이상 IP 카메라를 전문시공합니다. 디지털 감시 시스템 방식으로 원격지를 제어하고, 모션을 감지하고, 데이터를 검색하고 다양한 설정을 통해 백업 기능을 합니다. 선명한 화질과 편리한 검색으로 실시간 영상 확인이 가능합니다.
통신공사 사업도 하는데요. 학교, 기관, 공장, 건물, 상가, 가정 등 통신 공사와 관련된 모든 부분은 저희 회사 전문가가 출동해 안전하고 신속하게 도와드립니다. 통신장비, 설비 공사, 교환설비 공사, 선로설비 공사, 부가장비 공사를 하죠.
위생 관리 용역 업무도 합니다. 청소용역, 외벽청소, 저수조 청소도 하죠.
지난 30여 년간 지역 관공서와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등 다수의 공공기관 방범시스템을 설치하고 운영한 경험이 대청보안의 솔루션입니다. 인력과 기계경비를 통합운영하고 경비지도사는 현장 순회 교육을 합니다. 경비원은 월 1회 4시간 정기교육을 합니다. 인력경비지도사와 기계경비지도사 등 경비지도사와 특급기술자, 고급기술자 등 전문기술자, 경호학과 출신과 무술유단자로 구성된 출동요원, 긴급출동차량과 긴급시설 차량 포함 전문 인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출동요원 1명당 관리 고객이 100개소 미만으로, 타 경비업체 대비 1인당 관리개소가 4분의 1 수준입니다. 이런 특장점을 갖고 있지요.
저희 회사는 고객 지원을 위해 출동 요원 교육과 관리시스템이 철저합니다. 핵심가치 윤리교육과 예절교육을 진행하고, 전 직원 직무교육도 합니다. 신입보안요원은 3박4일 위탁신임교육을 실시하고, 본사는 100명 수용 가능한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월 1회 전 직원 대상 4시간의 직무교육을 실시하고, 지속적인 체력 단련을 위해 체육단체와 연계하고 있습니다. 산학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술 개발을 하고 있죠. 확실한 보상체계도 마련돼 있습니다. 기계경비와 인력경비가 별도로 보험에 가입돼 있죠. 기계경비보험은 대인의 경우 1인당 1사고당 보상한도액이 2억입니다. 대물은 1사고당 3억입니다. 인력경비의 경우 대인은 1인당 1사고당 1억, 대물은 1사고당 1억입니다. 이렇게 고객 지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생을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1981년 대청보안회사를 설립해 지금까지 건실하게 운영해왔는데요. 태권도 지도자 은퇴 후 운동과 유사하고 적성에 잘 맞는 보안 업무를 하게 된 거죠. 문재인 정부 시절 200여 직원들을 교육청에 이관시키는 정책으로 인해 회사가 위태로웠지만 단 하루도 급여를 밀리지 않고 안전하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연세 드신 분이라도 건강하시면 정년과 상관없이 일하실 수 있는 회사입니다. 학교 숙직 업무를 건강하게 하시면 되지요. 앞으로도 우리 지역 보안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리고 지금 건강 쪽 연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요. 100세 시대를 맞아 질병에 걸려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건강하게 살다가 웰다잉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대사증후군’은 식습관에서 오는 것입니다. 몸에 좋은 음식을 잘 섭취하면 인체는 스스로 자가치유능력이 있어서 건강한 몸으로 회복시켜 줍니다.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만드는 음식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요. 당뇨와 고지혈증, 치매와 심혈관질환에서 벗어나실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해드리기 위해 건강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부작용 없는 자연치유 건강요법을 통해 노후에 저보다 어려운 분들을 돕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제가 배우고 느끼고 체험한 지식들을 아낌 없이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주변 지인분들께 좋은 정보를 전달해드리고, 강의도 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기업을 키워나갈 생각입니다. 건강전도사가 되어 긍정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싶습니다. 어려운 환경의 분들이 대사증후군을 피해 치매와 심혈관질환에서 벗어나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사실 수 있도록 건강전도사로 선한 영향력을 펼치며 사는 게 제 소망입니다.
그리고 저의 단기계획은 오는 9월에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가서 교육을 하고 올 예정입니다.
‘긍수저’로서 건강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게 저의 가장 큰 바람이자 인생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편집위원(국장) hansung007@
▲1957년 대전 출생. 인천 체육 전문 대학 무도과 졸업, 목원대 이공대학 사회체육학과 졸업, 목원대 대학원 체육경영 석사학위 취득, 충남대 체육대학원 체육경영 박사학위 취득. MALAYSIA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 BURKINA FASO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 국군간호사관학교 태권도 강사, 대덕대학 경찰행정학부 겸임교수, 국제와이즈멘 한밭사랑클럽 회장, 대전시 장애인양궁협회장, 대한태권도협회 이사, 대한태권도협회 겨루기 부문 상임심판, 대한태권도협회 품새 부문 상임심판,대전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대전시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역임. 외무부장관 표창, 국무총리 표창, 부르키나 파소 국가훈장(슈발리에),대통령 표창. 1981년 대청보안(주)설립. 현재 대표이사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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