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스님이 들려주는 동학사의 전설

[충청박물지-네번째 이야기]길 없는 길을 따라서 ② 만우 스님이 들려준 동학사 전설

안순택 논설위원

안순택 논설위원

  • 승인 2007-11-20 00:00

신문게재 2007-11-21 12면

동학사의 가을은 아름답다. 일주문 근처에 불붙는 새빨간 단풍이며 세진정(洗塵亭) 부근의 샛노란 은행잎도 좋지만 단풍이 낙엽 되어 떨어질 때, 난분분할 때 정말 아름답다. 우중충한 빛깔이라고 말하지 말라. 허위허위 달려온 숨 가쁨을 다독거리고, 잠시 스스로를 되새겨보는 시간의 빛깔, 그것이 아닐지. 지난 주 목요일 동학사의 아침이 그랬다. 평일이고 아침 시간이었는데도 동학사 가는 길은 가는 가을을 붙잡아 맛보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80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1923년 11월 단풍이 흩날려 떨어지는 동학사 길을 따라 동아일보 기자가 만우(萬愚) 스님을 뵈러 왔다. 만우 스님은 동학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세 분 스님 가운데 한 분이다. 기자는 스님의 연세가 일흔아홉이라고 적었다. 노스님에게 기자가 물었다.

“동학사는 언제 창건되었습니까?”
“동학사의 연기(緣起. 기원, 유래)라고 문적(文籍. 문서나 서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번 병란에 불이 붙었으니 무엇은 남았겠습니까. 소승이 어려서 상원굴(上院窟)에서 공부할 적에 하루는 어떤 노인이 와서 동학사의 연기를 아느냐고 묻사옵기에 모른다고 했더니, 그러거든 들어라 하면서…소승이 동학사에서 육십여 년을 살거니와 그 이야기밖에 들은 게 없습니다.”(동아일보 1923년 12월 6일~8일자. ‘계룡산기`)

▲동학사 대웅전 /사진=김상구 기자
▲동학사 대웅전 /사진=김상구 기자

청량사와 동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노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오뉘탑(남매탑)의 전설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다. 요약하면 이렇다.
“한 스님이 암자를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찾아온 호랑이의 목에 걸린 뼈를 빼내주었더니 호랑이가 은혜를 갚으려 어여쁜 여인을 업어 왔다. 스님이 받아 살려서 눈이 녹아 길이 열리기를 기다려 여인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하지만 여인은 스님을 따라 집을 나섰고, 스님이 되었다. 둘은 오빠와 누이로 지내며 도를 닦았으며 함께 세상을 떴고, 둘 모두에게서 사리가 나왔다. 여인의 집에서 재물을 내어 탑을 세우니 오뉘탑이다.”

만우 스님의 이야기는 훨씬 구체적이다. 이야기 속 스님은 상원조사(上院祖師)이고 백제 사람이며, 여인은 경상도 상주 땅에 사는 김 씨의 딸이다. 그런데 끝맺음이 무척 흥미롭다.

“상주 김 씨 집에서 와서 오누이 사리탑을 쌓고 동학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김 씨 집안에서 동학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오뉘탑은 청량사지 쌍탑으로 불린다. 청량사(淸凉寺)라는 명문이 찍힌 와당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김 씨 집에서 오뉘탑을 세웠다면 그 절은 청량사여야 맞다. 그런데 만우 스님은 동학사를 세웠다고 했다. 청량사가 곧 동학사라는 뜻인가. 의문이다.
‘동학사 약력`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1962년 편찬된 이 책에는 스님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사찰 문서 속 오뉘탑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청량사 창건 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이 상원조사를 따라 출가했을 때 김 씨 집에서 재물을 내어 청량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상원조사 남매가 세상을 뜨자 조사의 수석제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오뉘탑을 세웠으며, 그 때가 신라 성덕왕 23년(서기 724년)이고 동학사가 창건된 같은 해라는 것이다. 청량사가 먼저 있었고 동학사는 다른 절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청량사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절이라고 해서 청량사라고 이름 했다고 한다. 신라가 망한 뒤 신라 유신 유차달이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을 모신 사당, 동계사(東鷄詞)를 짓고 절을 확장하면서 동학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뀌었을 뿐 청량사가 곧 동학사라는 이야기다.

청량사와 동학사는 다른 절인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은 절인가. 알고 있을 대웅전 앞 바위는 계곡물과 장난질할 뿐, 대답이 없다. 어쨌든 동학사는 신라 성덕왕 23년께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봉이 마련한 기틀, 만화가 꽃피우다.

과거 동학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693년 오재정(吳再挺)이란 선비가 계룡산을 유람하면서 들른 동학사의 모습을 그려 놓고 있다.

“…큰 절에 이르러 문루에서 쉰다…대웅전 명부전을 돌아보고 선당에 들어섰다. 그 서쪽은 승당이고 서상실과 송월료는 북쪽에 있다. 가운데 있는 석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골짜기에 암자가 많다.”

대웅전 명부전 선당 승당 서상실 송월료는 모두 건물 이름이다. 건물 이름을 모두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니 건물은 더 많았을 것이다. 동학사는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었던 것 같다. 석천은 지금도 대웅전 앞을 흐른다. 그러나 동학사는 정조 8년(1784년) 큰 불을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오재정이 보았던 동학사는 재가 되어 버렸고 승려들도 떠나버린다.

“근자에 절은 형편없게 되어 다만 작은 금불상 두 구가 안치되어 있을 뿐 절을 더 키울 수가 없었다. 월인 스님이 폐허가 된 것을 중창하기 위하여 모연금을 걷어 다시 초혼단을 쌓고 해마다 제사지내려고 하였으나 모연금이 적어 아직까지 착수하지 못했다.”(이원순(李源順), ‘동학동기유`. 1819)

이원순이 만난 월인은 동학사를 다시 일으킨 금봉월인(錦峰月印) 스님이다. 동학사는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금봉 스님은 먼저 나라가 승려에게 요구하는 부역, 양반가에서 부리는 사역, 관청에서 금전이나 물품을 강제적으로 뜯어가는 행위 등을 끊어내려 했다. 끊어 낸다면 그 힘을 동학사 중창에 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나라에 읍소했다. 그리고 끊어냈다.

금봉 스님이 마련한 중창의 기틀은 만화보선(萬化普善)에 이르러 결실을 맺는다. 1864년 가람을 복원하고 혼각 3칸을 마련한 것이다. 만화는 운구 남화 호봉 같은 사형제와 우운 같은 제자와 힘을 합쳐 동학사 중창에 온 힘을 쏟았다. 만화가 짓고 확장한 전각만 28칸에 이른다. 만화는 또한 강원을 열어 전국의 학승들을 동학사로 끌어들였다. 공부하는 절 동학사의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가 동학사를 재건했다면 그 뒤를 이은 만우상경(萬愚常經)은 그것을 지킨 스님이었다. 한말과 일제 초의 격심한 사회 혼란과 불안 속에서 동학사를 잘 지켜냈던 것이다. 물론 동학사의 재건은 계속되었다. 만우 스님 시기 12칸이 더 늘어나 동학사의 전각은 40칸에 이르게 된다.

“찰나 간에 성불하는 도량이어라”

만화가 세운 강원은 1956년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탈바꿈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비구니 강원이 들어서는 기간이 동학사가 비구니 사찰로 변하는 시기로 보인다. 비록 여성들이지만 비구니 스님들은 전쟁의 흔적을 씻어내느라 무척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동학사가 번듯한 모습을 갖추고 산 중턱에 흩어진 돌들을 모아 오뉘탑을 다시 세운 것도 이 때다. 원래 9층, 7층이었던 탑이 7층, 5층으로 낮아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금봉과 만화, 만우 세 스님을 동학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분들 반열에서 첫 머리에 두지만 이름 없는 수많은 스님들의 땀과 노력이 지금의 동학사를 있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력이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기에 동학사는 매끈하게 깎인 보석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동학사는 지금도 새로 지어지고 다듬어지고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돌 기단은 1935년에 조성된 것이다. 옛 것에 새 것이 더해지고 새 것이 옛 것과 어우러지면서 하루를 더할수록 아름다워지고 있는 것이다.

동학사 대웅전 뜨락 끝에는 계곡을 마주한 작은 발원비가 놓여 있다. 1959년 김치홍이란 이가 시주하고 정오(正悟) 스님이 지은 것이다. 동학사찰(東鶴寺刹)을 매 구절의 머리글자로 삼고 부처님 불(佛)자를 매 구절 여섯째 글자로 삼아 지은 칠언 절구의 시다.

“동방의 정기로 불천에 태어났으니/학 또한 부처님 아래서 춤을 추려는 듯/사찰 승도들의 마음 불령에 통하여/찰나 간에 견성 성불하는 도량이어라.(東方正氣生佛天/鶴亦願舞諸佛下/寺僧心念通佛靈/刹那見性成佛地)”

동학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모든 분들, 가꾸고 지켜온 분들, 공부하는 분들, 스치듯 혹은 머물다 거쳐 간 분들 모두의 뜻이 이러할 것이다.

현재까지 왔으니 이제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만화 스님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스님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강원(講院)으로 가야 할 것이다.

만화 스님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강원에서 스님들을 가르쳐야 할 강백(講伯)이란 사람이 오히려 학승들을 죄다 쫓아버렸다니 말이 되는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그는 제자이자 강백을 맡고 있던 경허(鏡虛)를 찾아 나섰다. 곧 불벼락이 떨어질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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